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직 내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은 하지 못했다. 내가 아직 아이를 가질 마음을 먹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랑 안 맞는 아이를 낳을까 봐 두려운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엄마와 사이가 멀어졌다. 삶에 대한 나의 관점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엄마의 인생관과 나의 인생관은 많이 달랐다. 내가 하겠다는 것들마다 엄마는 놀랐다. 나는 엄마가 상상했던 딸과는 다른 딸이 되어갔다. 물론 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사랑했겠지만 나는 몰랐다. 아주 어릴 때는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우리 엄마만큼 친절하고 재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내가 커가면서 엄마가 변했다, 고 청소년기의 나는 생각했다. 아마 내 인생 하나 생각하기조차 버거웠던 질풍노도의 시기였기 때문이리라. 사실 변한 것은 나였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의 사랑을 보지 못했다. 사랑은 귀한 거라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나 보다.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조금 더 커서는 내가 얼마나 엄마 속을 썩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하는 내가 엄마를 속상하게 하는 것처럼, 내 아이도 나와 달라서 서로 속상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다 커서 연애를 하게 되면서,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연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고유한 본성을 억누르기도 했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특성을 흉내 내려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며 이렇게 해서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 짜릿한 연애를 원하는 시기를 통과해서, 인생의 동반자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기에 들어섰다. 나를 꾸며내야 하는 관계를 갖느니 혼자 지내는 편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들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패스트푸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J는 햄버거와 피자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나는 햄버거를 좋아하는 J의 모습이 싫었다.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J의 인성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바라는 멋있고 성숙한 인간상을 설정해놓고, 그 모습에 J가 맞지 않으면 평가하고 실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연인과 사랑하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운데, 아이와의 관계는 얼마나 더 어려울 것인가? 아이의 모든 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직업 상, 많은 아이와 부모를 만난다. 아이들은 너무나 다양했다. 무척이나 다양한 특성들이 섞여 한 아이를 이루고 있었다. 간혹 어떤 아이는 다루기가 조금 힘들기도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힘들 때도 있고, 말을 너무 안 해서 힘들 때도 있었다. 너무 호기심이 왕성해서 난처할 때도 있지만, 아무 의욕이 없어서 곤란할 때도 있었다. 아이들만큼이나 부모들도 다양했다. 처음에는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도 집집마다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듭해서 겪을수록 그들 각자의 부모와 아이들 간의 관계는 모두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처음에는 비슷해 보이는 것들도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보인다. 이건 반대였다.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를 그 자체로 사랑하고 최고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모두 같았다. 아직 엄마 껌딱지인 어린아이들에서부터, 엄마가 수업하는 걸 보고 있으면 싫어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부모들은 모든 상황에서 그들의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때로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때가 있다. 매일매일 부모와 아이들을 만나면서, 누군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다.
“너는 튼튼이가 왜 좋아?”
J가 튼튼이를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한번 물어봤다.
“튼튼이는 내 모든 걸 다 받아주니까.”
맞다. 튼튼이는 J가 햄버거를 좋아하든 불량식품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늘 좋아해준다. J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튼튼이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모든 면에서 튼튼이가 다른 강아지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다. ‘빵야’나 ‘엎드려’ 소리에 맞춰 엎드리지 못하는 튼튼이가 좋다. 산책할 때 자기 갈길만 가지만 그래도 좋다. 당연하겠지만 튼튼이는 밥보다 간식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처럼 밥을 깨작깨작 먹기도 한다. 나는 그런 튼튼이의 모습보며 실망하거나 튼튼이와 함께하게 되면서, 튼튼이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건 튼튼이가 먼저 나를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튼튼이는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어떤 멋진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J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다면 튼튼이처럼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가 어떻게 생겼든, 무엇을 좋아하든, 상관없이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미 튼튼이를 사랑하면서 겪어보고 있었다. 튼튼이에게 배운 마음이다.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가게 되어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다다음주 주말에 서울 갈 것 같아. 그날 엄마, 아빠 다른 일정 있어요?”
“있어도 비울게.”
우리 엄마 아빠도 내가 태어나고 얼마나 큰 사랑을 주었을지 마음으로 짐작이 간다. 대화가 많지 않았던 청소년기에도, 집을 떠나 살게 된 20대 이후 시절에도, 늘 나를 생각하며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지 조금은 알겠다. 무심한 딸은 개를 키우고서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을 가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