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는 계급과 철학이 있었다
색에도 계급과 철학이 있었다? 이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말일까? 근데 어쩌나? 색에도 엄연히 그러한 장중함이 있었다 하니 말이다. 적어도 그 옛날 옛적에는. 먼저 색의 계급성에 대하여 한마디.
여러분은 신라의 골품제라는 강력한 신분제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라는 최하위 17 관등인 조위로부터 최상위 각간(다른 말로 이벌찬)에 이르기까지 17계단의 등급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벌찬, 이찬, 파진찬, 대아찬, 아찬 등등과 같이 ‘찬’으로 끝나는 관등을 가진 집단은 대체로 신라사회에서 매우 높은 계층이었다. 신라 사회는 관등을 구분하여 직위를 구별할 뿐 아니라, 그들을 다시 1~5, 6~9, 10~11, 12위 이하 네 그룹으로 나누고, 관복의 색깔을 구분하여 정했다.
실례로, 최상위 그룹인 1 관등에서 5 관등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색 옷을 입었다. 자색을 밋밋하고 단순하게 보라색이라고 규정하지 말자. 한자로 자(紫)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함이 있는 색깔이다. 사전에 찾아보면 자색은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이라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색을 검은 듯, 붉은 듯 보는 각도나 빛의 반사에 따라 사뭇 느낌이 다른 오묘한 색이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그래서 자석(紫石)은 벼루를 일컫는 단어이고 보면, 자색은 검은색을 뜻하기도 할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다른 예로 홍어로 유명한 흑산도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전 선생이 자산도라 일컬었다. 물론 한자는 다르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게 사용하였을 것으로 유추한다. 비슷하게 오묘한 색을 나타내는 한자어가 현(玄) 일 것이다. 현(玄)은 그 푸름이 너무 깊어 거멓게 보이는 색을 표현한다. 이렇게 자, 현, 흑은 닮은 듯, 다른 듯, 경계를 정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는 색일 것이다.
그다음은 비색(緋色)을 입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푸른색을 나타내는 비색(翡色)과는 한자의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색 역시 비밀스럽다. 짙은 분홍과 같이 붉은색으로 설명하듯, 이 역시 한마디로 이렇다 할 단순한 색이 아닐 것이다. 다음 그룹은 청색(또는 비색 翡色)을 입었고, 가장 하위 그룹은 황색의 관복을 입었으니 이쯤 되면 옷의 색은 곧바로 계급을 나타내었던 것이니, 색깔은 강력한 계급성을 갖는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옷감을 물들이기 위해서는 염료가 필요하다. 지금이야 염색을 할라치면 쉽고 간편한 화학염료가 많지만, 화학 염료가 없던 그 옛날에는 어떻게 옷에 염색을 했을까? 당연히 자연물에서 염료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황색 계열의 색을 내는 자연물은 치자나, 감과 같은 식물이 쓰였다. 푸른색의 대명사인 쪽빛은 바로 ‘쪽’이라는 한해살이풀이 원료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황색이나 푸른색은 염료를 구하기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는다.
그럼 붉은 계열의 옷은 어떨까? 한복 전문가는 붉은 물을 들이기 위해서는 홍화 등이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붉은색을 얻기 위해서는 갯 민달팽이류를 썼다고도 전해진다. 얼핏 지나듯이 읽었던 어느 글에서, 당시에 붉은 옷 한 벌을 짓기 위해서 민달팽이가 수만 마리 필요했다 할 정도로 특히 붉은 계열의 천연염료를 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듯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붉은색은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색이 된다.
이러한 색의 계급성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조선 시대를 재연한 듯한 사극에서는 다양한 색의 관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푸른색의 관복은 중하위 관직들이 입는다. 붉은색의 관복은 당상관 중심의 고위 관직자가 입고 등장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다만 고대에는 다소 색의 계급성이 낮았던 황색이 음양오행 사상과 중국의 정치사상이 보다 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황제를 상징하는 색으로 이미지화해서 더 이상 관복의 색으로 사용되진 않았던 듯하다. 다음으로는 색에 담긴 철학에 대해 두 번째 한마디.
음양오행, 오방색, 오간색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이제부터 간략히 알아보자. 먼저 음양오행. 이는 한국을 포함한 동양적 우주관의 근원을 이루며 우리 민족의 사상적 원형의 바탕을 이루는 사고 체계이다. 음양오행 사상은 음(陰)과 양(陽)을 중심으로 만물이 생장하고 변화하며 소멸하며, 이에서 파생된 오행(五行) 즉,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 기운의 움직임으로 우주와 인간생활의 모든 현상과 생성소멸을 해석하는 사상이라고 개략할 수 있다.
오행에 따르면 각 오행은 그것이 가리키는 각각의 우주의 방향이 있고, 상징색을 달리 한다. 이 방위와 관련된 색을 오방색, 혹은 오정색이라 한다. 오방색은 오행의 각 기운과 직결된 청(靑, 나무의 색, 동쪽), 적(赤, 불의 색, 남쪽), 황(黃, 토의 색, 중앙), 백(白, 쇠의 색, 서쪽), 흑(黑, 물의 색, 북쪽)의 다섯 가지로 이 기본색은 명도와 채도가 분명하여서 이 오방색은 양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졌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신지? 바로 사신도이다. 동 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이것이 바로 음양오행에 입각한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는 상상 속 수호신이요, 고분 벽화에 그러한 상징색들로 멋들어지게 그려졌던 것이다.
오방색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앞에서 말한 고분도 있지만, 가장 전형적인 곳은 바로 절집이나 궁궐의 단청이 되겠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연지곤지, 색동저고리, 조각보, 국수 고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색을 통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우리네 삶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져 단어의 흔적 조차 찾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심히 있긴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이런 색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비슷한 서양 색들은 그들을 섞을라 치면 지극히 조악하고 천박할 수도 있을 터인데, 우리네 의, 식, 주에서 드러난 오방색의 조합은 지극히 조화롭다는 점이 늘 나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시시콜콜하고 복잡하게 생각되겠지만 이왕 나선 길, 한 가지만 더!! 오방색 사이의 혼합색을 오간색이라 불렀다. 동방 청색과 중앙 황색의 간(혼합)색인 녹색(綠色), 동방 청색과 서방 백색의 간색인 벽색(碧色), 남방 적색과 서방 백색의 간색인 홍색(紅色), 북방 흑색과 중앙 황색의 간색인 유황색(硫黃色), 북방 흑색과 남방 적색과의 간색인 자색(紫色)이 있다. 이 색들은 오방색에 비해 명도와 채도가 낮다고 한다. 그래서 음양오행에 입각하여 볼 때는 오간색은 음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우리는 색 하나에도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개발이란 미명으로 마구잡이로 지어지는 아파트의 근본도 모를 색들과 모양새에 '안구 테러'를 당하고 있는 나는 그만큼 우리 색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들리는 바로는 우리의 색과 우리의 디자인이 외국에서는 각광을 받고 있다 하는데, 정작 우리 땅에서는 그 존재를 찾기 어려운 이 아이러니가 씁쓸하다. 이제쯤은 서양의 문화에 비해 그 역사적 깊이와 넓이가 막강한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색에 대해서도 한번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