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나 자신의 인정>
#글을 열며...
작년 3월, 내 머릿속에서 절대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흔들어 외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때였다. 일명 ‘코로나 우울’. 내 일상의 모든 것들의 변화가 낯설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에게 가장 큰 변화는 학교의 수업 방식이었다. 매일 밥 먹듯이 아니, 밥을 먹지 않고도 가야 했던 강의실은 출입 제한 구역이 되었고, 고개를 돌리면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친구들은 노트북 모니터 너머에만 존재했다. 생동감 넘치던 수업은 마치 고등학생 때 지겹게 듣던 인터넷 강의 같았다.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3학년은 본래 그런 것인지 몰라도 유독 많게 느껴지는 과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침대 위로 쌓여만 갔다. 내방은 독서실이자 강의실이며, 동시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유독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는 것도, 마스크 없이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도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은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아침이 되면 나는 정리되지 않은 책과 강의 자료들과 함께 침대에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져 잠을 청했다. 조금 여유로운 날이면 그래도 자정이 넘어가기 전에는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불을 끄고 눈을 감으면 ‘나는 왜 사는 걸까? 죽지 않으니 사는 것은 아닐까?’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되어 내 밤을 가득 메웠다. 매일 밤 정신적으로는 지쳐있었으나 잠에 들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우울증 초기 증상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때보다 더욱 심해졌고, 그렇다고 내 주변이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재 나의 삶의 만족도는 180도 변화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삶의 행복은 점점 더 커지리라 확신한다. 나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만의 방향을 찾고, 나에게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단계를 거침으로써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당당히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공감 가는 이야기일 수도, 또는 신선하고 색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와 닿지 않을, 그저 평범한 타인의 삶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내가 그러했듯 당신 역시 다른 이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더욱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삶의 이유가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로 가득 새겨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전의 나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만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듯 했다. 그러나 바깥 활동이 적어지고 나서부터는 인정받는 일이 자연스레 줄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갔다. 타인의 인정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나는 나를 인정해주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뚜렷한 목표 하나 없이 누군가가 그려나가고 있는 삶을 어설프게 모방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 내가 아닌 이들은 모두 멋있게만 보였다. 나는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에 사용했다. 어느 것 하나 내가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할 줄 몰랐다. 한마디로 나는 내 삶의 주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만의 방향을 찾고, 나에게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단계: 나를 인정해주기
라오스는 예쁜 자연 속에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숨 쉬는 나라다. 나는 아홉 살 무렵 한국을 떠나 이곳 라오스에 살게 되었다. 라오스는 동남아 국가로 일 년 내내 낮 기온 30도, 높게는 50도 정도 이상의 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한국의 여름 날씨를 찜기에 쪄지는 기분이라 비유한다면 라오스는 직화구이다. 습하지는 않지만, 햇볕이 살갗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따갑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한국이 한글을 사용하듯, 이들만의 언어인 라오스어를 사용한다. 라오스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나는 현지 학교에 다니며 손짓발짓으로 그들과 어울렸고, 또래 친구들과 서로 다른 삶을 공유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찾아 나갔다. 나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들의 삶과 문화에 스며들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린아이인 나에게 라오스어는 배우고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소통의 수단이었다.
라오스에서의 7년이 흐르고 2012년, 나는 열 여섯 살이 되었다. 개인적 차이가 있겠지만 그맘때의 아이들은 자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나 역시 그런 고민과 더불어 인생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 등을 싹틔우던 때였다. 그 시절 나의 머릿속은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보다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자, 당장은 그 욕망을 해소할 수 없다는 현실이 만들어낸 갈망이기도 했다. 당시 라오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생활을 예로 들자면, 한국이었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화관이 당시의 라오스에서는 단 한 곳도 없었다. VOD 서비스는 당연히 없었고, 인터넷도 아주 느려서 동영상 한 편을 보려면 말 그대로 몇 날 며칠 동안 다운로드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자책의 보급률이 높지 않았고, 종이 서적은 무게가 상당해 배송비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도서 배송이 가능한 항공편마저 아주 드문 것도 한몫했다.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교육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현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 과정들은 모두 라오스 중심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미술을 배울 때는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라오스의 미술에 대해서만 배웠고, 음악, 체육 분야도 다른 나라의 이야기는 없었다. 오로지 라오스의 과거에서부터 현재만을 다루었던 교육이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개개인의 발전보다는 공동체적인 부분에 치중하는 공산주의 이념이 반영된 것이리라. 이런 고립된 곳에서 불만이 쌓여가던 중, 특히 큰 스트레스가 된 것은 ‘언어’였다. 지금은 꽃보다 청춘과 같은 TV 프로그램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여행을 위해 찾는 곳이지만, 10년 전의 라오스는 한국 사람 중 10명 중 1명이 알까 말까 한 미지의 나라였다.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 내가 라오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면 빠지지 않고 듣는 질문이 있다. “라오스어로 ‘안녕하세요’가 뭐야?”
특별히 해외에 나가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는 5개 국어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Hello(헬로), Bonjour(봉주르), 你好(니하오), こんにちは(곤니찌와), Hola(올라) 등등... 가장 기본이 되는 인사말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인지도와 비례하곤 한다. 즉 라오스말로 인사를 해달라는 요청은 긍정적으로 보면 라오스를 향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라오스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한국 친구들은 라오스의 수도에서 국제학교에 다니거나, 라오스가 아닌 나라에서 살며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다른 선진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친구들 틈에 라오스어를 쓰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라오스어를 잘하는 것. 과연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껴졌다.
당시 갑상선기능항진증을 앓고 있던 나는 매달 한 번씩 꾸불꾸불한 산길을 열두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수도에 있는 병원에 가야 했다. 혈액검사를 통해 호르몬 변화를 감지하고 먹는 약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한 버스 좌석에 자석처럼 붙어있자니 엉덩이는 감각을 잃어갔다. 바깥의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 한 탓인지 버스 안의 공기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음에도 시원하지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검사를 위한 금식 때문에 비어있는 나의 속을 차멀미가 더욱 괴롭게 했다. 버스 창문에라도 머리를 기대지 않으면 어지러움과 매스꺼움을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어폰을 꽂은 귀 사이를 헤집고 들려오는 시끄러운 대화 소리는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MP3의 작은 버튼을 눌러 볼륨을 높이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힘든 여정을 거쳐 수도에 있는 병원에서 혈액을 채취한 후에는 그 혈액을 비행기로 한국에 보냈어야 했다. 라오스에서는 혈액 채취만 가능하지 분리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를 뽑고 또 다시 열두 시간의 긴 여정을 거쳐 비로소 집에 왔을 때 나는 그야말로 녹초 그 자체였다. 가장 기본적인 피검사마저 이토록 어려운 것이 라오스의 의료 현실이었다. 이런 환경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라오스에 의료봉사를 왔다. 천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평소 부모님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라오스 오지 마을 곳곳을 다녀봤지만 전문적인 치료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오스는 365일 뜨겁기만 한 나라지만 그날은 유독 더욱더 따가운 햇살 때문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든 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찡그린 눈 사이로 불타는 태양과 상반되는 푸른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늘 나와 함께 봉사를 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비록 낯설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뜨거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접수 시작 몇 시간 전부터 길게 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픈 곳을 치료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의 첫 통역이었다.
45도가 넘는 곳에서 아침 아홉 시부터의 통역은 혀를 아리고 목이 타들어 가게 했다. 다섯 시간이 넘어가는 때였다. 병원을 가득 에워싼 사람들 틈에,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듯한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턱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귀에 자그맣게 들려왔던 소리, “할아버지, 여기서도 다른 병원들처럼 제 치아를 뽑아버린다고 하면 어떡해요?” 한국에서 충치 때문에 자연치아를 발치하는 경우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리는 최후의 선택이다. 우리가 흔히 치아를 평생 자산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치아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라오스에서는 달랐다. 라오스에서 치통 때문에 치과를 간다는 건 발치를 하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경치료를 비롯한 모든 충치 치료를 할 수 없었기에 조금이라도 통증을 유발하는 치아는 그냥 뽑아버리는 것이 그때 그곳의 현실이었다. 기술이 발달한 곳에서는 기존의 치아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평생토록 참지 못할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라오스에서 살고 있었던 아이도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치아를 그대로 잃을뻔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번 의료봉사 팀의 방문 덕분에 그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치료가 끝난 아이는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으로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컵짜이 라이라이.” 나는 그 말을 의사 선생님에게 전달했다. “정말 많이 감사합니다.” 아이의 할아버지도 그런 손자의 손을 잡고 몇 번을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나는 가슴 속으로 뭔지 모를 뜨거움을 느꼈다. 아직도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봉사가 끝나고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의사 선생님들은 그날 했던 봉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속해 찬찬히 기억을 더듬다 보니 내가 했던 일들이 굉장히 값지게 느껴졌다. 내가 그날 했던 통역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영어도, 프랑스어도, 그 어떤 다른 나라의 언어도 아닌 라오스어를 사용할 줄 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의 불만의 가장 큰 구석을 차지하던 라오스어가 빛을 바라는 순간이었다. 치과 진료 외에도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 수많은 환자가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건강 자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고, 통증의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가던 사람들은 평생을 고통 속에서만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어디가 아픈지 직접 느끼고 표현하는 환자도 아니었고, 직접 진단하고 치료를 해주는 의사도 아니었다. 그저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고, 의사들의 진단과 처방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렇지만 이런 전달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 누군가는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도, 생명과 직결된 건강 자산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치와 불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내가 라오스라는 환경에 불만족을 가진 이유는 나의 성공의 기준을 타인의 시선에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의 세상에서는 세계 만인의 공통어가 되는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곧 성공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공하기 위해 영어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선진국의 언어들은 단순히 내 부러움의 대상에 불과했다. 나는 세상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나를 향해있기를 바랐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길 갈망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내 모습과 비교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의료봉사 통역을 담당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느끼고 인정했다. 엄마도, 아빠도, 친구도, 선생님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그 경험을 통해 쾌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라오스라는 나라의 인지도는 곧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나의 비교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잣대에 불과했다. 그 나라가 글로벌 시대의 환경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이제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인지도는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말만 전달했을 뿐인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있던 그곳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마음으로 느끼며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험을 했다. 그 가치는 그때 당시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일부로 스며들었던 나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나의 불만에 불과했던 것들이 시선을 다르게 하자 새롭게 다가왔다. 라오스를 비롯한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를 계기로 나는 의료봉사 외에도 고아원 학교 교육봉사, 오지마을 교회 봉사 등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 어떻게든 갔다. 배를 타고 길고 어두운 강을 가기도 하고, 산사태 위험이 큰 비포장도로를 달리기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나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진심을 전달하는 다리가 되었다.
타인의 인정이 곧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성공의 기준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고 그 인정을 즐긴다. 나는 초연결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타인의 인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즐기기로 했다. 우선 순위를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나 자신의 인정으로 두었다. 이를 위해서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이었던 방법은 나의 만족감과 행복을 나의 성공의 기준으로 두었던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슬픔을 의존하지 말자.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불안정한 존재들일 뿐이다. 나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믿음직한 심판이다.
-책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中-
위 책의 내용은 한창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했던 나에게 힘이 되는 구절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이 말은 수많은 에세이 및 심리학에서도 하는 말이지만 또 한 번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정말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타인도 결코 당신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타인에게 그동안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인정을 받은 경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런 타인의 인정은 때때로 내가 몰랐던 나의 재능과 또 다른 모습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하나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지표를 통해 당신의 삶에 또 다른 시야를 갖게 되는 등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이는 정말 큰 축복이다. 다만, 그런 지표가 당신의 삶에서 유일한 잣대가 되지는 않길 바란다. 타인의 인정을 받았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여러 생각의 단계를 거쳐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좋겠다. 나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믿음직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당신을 아무리 무가치하게 여길지라도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존중하며 당당해지자. 우리 모두 그래도 된다. 오글거리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한 번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