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시인 백석과 윤동주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일본 시인이다. 백석 선생은 당시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렸고, 이시카와는 그런 백석이 좋아한 시인이었다. 이시카와의 <장난삼아>라는 시의 구절 앞에서 생각이 깊어진다. 어제도 어머니의 전화를 대충 받았지만, 내일은 내가 먼저 전화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듯이 나이가 드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당연히 피할 수도 없다. 아쉽게도 시간은 인간이 무한하게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뮤지컬에서 모든 조명이 켜지는 가장 빛나는 순간은 마지막 커튼콜 때다. 하지만 커튼콜이 끝나면 배우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무대는 막을 내린다.
운동선수들의 커리어 역시 그렇다. 길거나 짧았던 누군가의 커리어도 언젠가 막이 내린다. 훗날 코치로 감독으로 또는 방송인으로 우리는 왕년의 스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코트와 그라운드, 마운드 위의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유한하다. 그 시간의 끝에서 가장 아쉬운 사람은 본인일 것이다. 시원섭섭함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선수들은 눈물로 표현하곤 한다. 또 아쉬운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팬들이다. 마지막 모습도 그나마 성공한 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다. 은퇴식 없이 엔트리에서 이름이 사라진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개인적으로 내 코 끝을 찡하게 했던 은퇴는 3명 정도 있다. 은퇴경기에 하필 김광현을 만나 3개의 삼진을 당한 양준혁과 은퇴경기에서 60점을 쏘아 올린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은퇴식조차 가지지 못했던 임창용. 내가 이 선수들은 보낼 때 공통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1년만 더, 아니 2년만 더'였다. 그들을 보내고 나면 진한 아쉬움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오승환, SAVE US 'MORE'
요즘 내가 '5년만 더'를 강하게 외치고 있는 선수가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이다. 오승환은 2005년 대졸 신인으로 프로에 입단해 10승-10홀드-10세이브, 프로야구 최고의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했다. 물론 신인왕 타이틀도 얻었다. 이후 오승환은 다섯 차례 세이브왕을 차지하며 '돌직구'로 KBO를 평정했다. 압도적이었고, 정말 'DOMINANT'(미국 프로스포츠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 번역하자면 '지배적인')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선수였다.
오승환은 보직은 불펜투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등판하는 '마무리 투수'다. 2006년과 2011~2013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명실상부 '삼성왕조'의 가장 막강한 투수였다. 이 기간 삼성은 7회까지 리드한 경기에서 단 1번도 패배하지 않고 130연승을 달성했다. 그것도 두 차례나. 물론 정현욱, 권오준, 안지만, 권혁 등 다른 불펜 투수들도 소위 '국대급'이었지만 오승환은 '월드클래스'였다. 오승환을 상징하는 노래도 있다. 안타까운 의료사고로 목숨을 잃은 가수 신해철이 작사·작곡한 'Lazenca, Save Us'. '라젠카'는 90년대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허접한 스토리 때문에 후평은 그다지 좋지 못한 수작인데, 주인공 로봇이 등장할 때 나오는 노래가 바로 오승환의 등장곡이다. 로봇이 지구를 지키듯 오승환은 마운드에 올라서 삼성의 승리를 지켜냈다. 삼팬들은 한동안 '역전패'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주구장창 전설을 읊었는데, 오승환의 통산 성적과 커리어 하이 시즌 성적을 먼저 보자.
54경기 1승 0패 47세이브(역대 한 시즌 최다) 평균자책점 0.63 탈삼진 76 WHIP 0.67
오승환은 임창용-이대호와 마찬가지로 NPB를 거쳐 MLB까지 다녀왔다. 앞선 두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 비하면 오승환은 메이저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한·미·일 야구를 모두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메이저 48SV, 일본 프로야구 80SV 기록) 지난 시즌을 제외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산 WHIP가 1 이하일 정도로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선수가 U턴을 해서 자국 리그로 돌아왔다. 삼성팬뿐 아니라 국내 야구팬들조차 기대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돌부처가 낯설게 느껴진다.
-2020시즌 (7월 19일 기준)
15경기 1승 1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4.91 탈삼진 9 WHIP 1.64
오승환의 대변인은 아니지만 일단 이 성적을 감싸고돌자면, 우선 2가지 이유가 있다. 팔꿈치 수술과 실전 적응. 오승환은 지난해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원정 도박 파문으로 국내 복귀 후 징계를 받으면서 한동안 출전하지 못했다. 수술 후 재활을 하고 2군에서 준비과정 없이 바로 1군에 투입되기도 했다. 허삼영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오승환 정도 투수가 검증이 필요한가?"라고 말했다. 오승환이 복귀하고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2주 정도만 퓨처스에서 적응기간을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오승환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대신 변명을 적어봤다.
그러면 실제로 이 성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냉정하게 말해서 마무리 투수의 평균자책점이 아니다. 셋업이나 필승 계투의 자책점도 이 정도면 곤란하다. 야구팬을 떠나서 오승환이라는 선수를 좋아하는 나도 당황스럽기 마찬가지다. 신인급 선수에게 안타를 맞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의 오승환은 내가 본 적 없는 오승환이다. 표정 변화가 없기로 유명해 '돌부처'라는 별명이 붙은 선수인데, 그런 표정은 정말 낯설다. 뭐가 그리 문제일까?
Q1. 구속 저하?
150.5→149.6→147.4→146.6→145.5우선 눈에 띄는 것은 구속 저하다. 지난 5년간 오승환의 구속은 계속 떨어졌다. 올 시즌 평균 구속은 속구가 145.5km, 슬라이더가 135.2km다. 빠른 공의 기준이 된다는 145km는 넘지만, 우리가 알던 오승환이 아니다. 돌직구가 150이 나올 때(2016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 오승환의 기대 피안타율(XBA)는 0.191에 불과했다. 삼진 비율은 32.9%. 메이저에서도 최상위 클래스 수치다. 오승환은 구속 - 삼진율 - 피안타율 - 방어율의 상관관계가 뚜렷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구속이 빠를 때 헛스윙을 많이 유도해 삼진을 많이 잡았고, 피안타율이 낮았으며, 방어율도 낮았다. 하지만 구속이 떨어지면서 나머지 수치들은 다 치솟고 있다. 돌직구의 올 시즌 구종가치는 -0.73. 돌직구가 속도를 잃은 것은 마치 류현진의 체인지업이 떨어지지 않고, 김광현의 슬라이더가 휘지 않는 것과 같다.
Q2. 가벼워진 돌직구?
145km는 냉정하게 느린 공이 아니다. 오승환은 빠르기보다 끝이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투수였다. 오승환은 사과로 가로로 쪼개는 강한 악력으로 속구에 많은 회전을 걸었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분당 회전수 수치 직접 비교는 어렵다. 같은 선수 사이에서 200 가까운 오차가 생긴다. 직접 비교는 하지 않겠다) 국내 최전성기로 꼽았던 2011년 오승환의 분당 회전수는 2651, 올해는 2465다. 180 정도 차이가 난다. 큰 차이로 보이지만 초당 회전 수를 환산하면 초당 3.1회 차이다. 오승환의 공은 대략 0.45초 만에 포수 미트에 도달할 것이다. 그동안 1번 회전을 더하는 차이 정도다. 이게 그렇게 큰 차이를 미칠까? 2400회도 평균보다 높은 회전 수다. 방어율 1.94, 세이브 리그 1위를 했던 2012년은 올해보다 회전수가 더 낮았다. 회전수가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Q3. 사라진 이중 키킹?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다. 특유의 디셉션의 이점이 사라졌다. '이중 키킹'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의 투구폼에 해당하는 것이고, 오승환의 경우는 '이단 스트라이드'가 정확한 표현이다. 전성기 오승환은 와인드업 동작에서 몸을 움츠렸다가 무게 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오면서 공을 뿌렸다. 그 과정에서 디딤발이 되는 왼발이 땅을 한번 찍었다가 나온다. 강한 하체의 힘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밸런스가 잘 잡혀서 가능한 투구 동작이다. 결과적으로 최종 포지션까지 '따, 닥!' 느낌으로 두 번 스트라이드를 밟는 것이다. 타자들 입장에서는 기다리고 있다가 타이밍이 망가진다.
(클릭하면 GIF. 이 와중에 삼성 줄무늬 유니폼은 정말 강해 보인다. 줄무늬가 없으니 수사자 갈기가 사라진 느낌이랄까.)
돌직구가 헛스윙 비중이 높고, 공이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은 이중 스트라이드의 효과를 많이 봤다. 이단 동작 없이 부드럽게 나오니까 타자들 입장에서는 타이밍 잡기가 더 쉬운 것이다. 타자 입장에서는 결국 타이밍 싸움이다. 떨어지거나, 빠르거나 상관없이 제 타이밍에 갖다 맞혀야 하는데, 오승환의 공이 예전보다 타이밍 잡기가 쉬워진 것이다.
오승환은 지난달 16일 한·미·일 통산 400세이브를 달성한 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몸 상태는 100%다"라며 "이중 키킹은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다. 동작이 달라진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달리 투구폼을 바꿨던 것도 아니라고 한다. 결국 자신의 최적의 투구폼을 찾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오승환은 연투를 통해 컨디션이 올라오는 선수다. 오래 쉬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더 많은 투구를 통해서 컨디션을 올리고 자신의 폼을 빨리 찾아야 한다.
돌부처여, 5년만 더 합시다!
컨택하기도 어려웠던 돌직구였는데, 이제 타자들이 작정하고 빠른 공만 노리고 나온다. 배트를 짧게 잡고 직구만 노리는 상태 어린 타자를 보면서 본인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다. 우리 나이 39살. 이제 곧 불혹이다. 돌아와줘서 너무 고맙지만, 오승환이 무너지는 경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래 언제 적 오승환이냐. 떨어질 때도 됐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부모가 나이 듦을 느꼈을 때 찾아오는 그 황망한 감정까지는 아니겠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수가 고령이 된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어서 기량이 떨어진 게 아니라 바로 잡을 수 있는 원인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82년은 한국 프로야구의 원년으로 이때 태어난 82년생 선수들은 황금세대로 불린다. 오늘 글의 주인공 오승환부터 이대호, 추신수, 김태균, 정근우, 채태인, 손승락, 김강민 등. 82년생으로만 팀을 꾸려도 (한 3년 전에는) 우승을 노려볼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선수들이 나이가 들어서 성적이 곤두박질치는'에이징 커브'를 맞이하고 있다. 대부분 이 하락 곡선에서 반등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야구는 자기 관리만 철저하면 비교적 선수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스즈키 이치로는 오승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서 40 도루를 기록하고 그 이후 7년을 더 뛰었다. 송진우는 오승환 나이에 172 이닝을 던지고 11승을 거뒀다. 내가 오승환에게 바라는 것은 '5년만 더'다. 어릴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비롯해 몸 관리를 잘하기로 유명한 선수다. 지금 찾아온 위기는 쉬이 넘길 위기는 아니지만 또 해답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대투수가 또 한국프로야구에 언제 나올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선수 오승환과 작별하는 건 5년 뒤라도 늦지 않다.
오승환, SAVE US MORE!
사진출처 : KBO 홈페이지,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뉴스1, SBS스포츠 중계장면(디씨인사이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