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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하는 공항은 일부에 불과하다 - 5

비상구는, 비상시에만 엽시다. 제발요

[24년 1월 JAL 화재 시 비상구 탈출 장면/ BBC 발췌]

마침내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보던 그 일이 벌어졌다. 비행 중에 비상구가 열렸다.


23년 5월, 비행기 착륙 직전, 약 200여 m 상공에서 승객이 비상구 문을 여는 전대미문의 사고가 발생했다. 원인은 승객이 “답답해서”. 결함이 아니었다.


사실 나도 늘 비행기를 타며 의아하고, 불안하고, 궁금했던 점이었다. 비상구는 너무나 모든 사람이 만질 수 있지 않나?


여행 좀 해본 당신이라면, 한 번쯤은 비상구좌석에 앉아봤을 것이다. 비상구 좌석에 앉으면 이쁜 언니들이 와서 설명해 준다. “당신은 비상시에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블라블라~ 승객탈출을 위해 도와주어야 하며~ 블라블라~” 혼자 여행 다닐 때는 비상구 좌석에 꽤나 앉아봤는데, 승무원의 안내를 듣고 나면,  불현듯 저 문을 한번 열어보고 싶은 묘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비상구, 손 뻗으면 바로 닿네.. 저 버튼 누르고 돌리면.. 이 큰 문이 그렇게 쉽게 열리려나? 열어보고 싶다’

글로 쓰니 내가 무슨 정신착란증 병자 같은데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문을 연 미친 사람을 두둔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비상구가 상당히 좌석과 가까운 곳에, 호기심을 자극하게 생긴 건 사실이다. 사실 비상구는 비상 탈출이 필요한 상황에서 승객들의 신속한 탈출을 위해 눈에 띄게, 조작하기 쉽도록 설계된다고 한다.


비상구 좌석은 구조적으로 다른 좌석보다 좀 더 넓을 수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승객들이 선호하는 자리이다. 비상구 유료화 이전, 비행기 많이 타 보신 분들은 십중팔구 “거~비상구 있재~? 내놔라~” 하시곤 했다. 이제 국내 모든 항공사들이 비상구를 유료로 판매하게 되었지만, 이 좌석의 본질은 숭고한 봉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상구 좌석의 승객은 비상 상황 시 승무원 지시에 따라 승객의 탈출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약자, 특히 만 15세 미만 어린이, 어린이 동반 승객, 몸이 아픈 승객, 임산부 등은 앉을 수가 없다. 신체가 건강해야 하고,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야 하므로 해당 항공사의 모국어, 최소한 영어는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까다롭게 엄선된(?) 승객만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비상구와 얽힌 에피소드는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공항 직원끼리 모이면 밤을 새도 모자를 지경이다. 아래는 비상구에 얽힌 에피소드 몇 가지.


1. 환자이지만 환자가 아닌 형


승객 “아가씨, 나 다리가 너무 아픈데, 비상구 좀 줘”

나 “손님, 다리 불편하세요?”

승객 “응, 작년에 수술해서 다리 아파. 비상구 아니면 안 돼 “

나 (클레임을 감지하고 호칭을 아버님으로 변경) "아버님, 비상구는 비상시 승무원 도와주셔야 해서 몸이 불편하시면 비상구 못 앉으세요..ㅠ 다른 자리로 드릴게요”

승객 (당황스러움이 얼굴을 스침. 갑자기 존댓말을 하신다) “... 사실 다리 안 아파요. 그 정도는 아니야”

나 “아까 너무 아프셔서 비행기 타는 것도 힘들다고 하셨잖아요ㅠ 죄송하지만 제가 말씀을 들어서 비상구좌석은 드릴 수가 없어요”

승객 “아니, 나도 말 안 한 셈 칠 테니까, 아가씨도 못 들은 걸로 해. 내가 저번에 비상구 앉아보니 편해서 그랬어요”

나 “정말 죄송해요. 안됩니다.”

승객 “.. 아 진짜!!! 융통성 없네!!! 아니 내가 어디다 말 안 하겠다고!!!!!!! 안 아프다고!!!”


2. 비정한 부모 형


손님 “비상구 남은 자리 있어요?”

나 “네 지금 가능하세요! 비상시에 승무원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현재 몸이 편찮으시거나, 일행 중에 아이가 있으신가요?”

손님 “안 아파요. 일행 없어요. 승무원 잘 도와 드릴게요^^ 운이 좋네요”


너무나 젠틀하고, 넉살까지 좋으셔서 응대 내내 기분이 좋았던 분이었는데,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2시간 후 다급히 날 찾던 매니저 왈,


매니저 “아니!!! 비상구 배정하면서 일행 확인도 안 해???? Xxx 편 xx자리 손님!!!”

나 “엥? 혼자라고 하셨는데요?”

매니저 “애가 셋이야!!!!! 만석이라 바꿀 자리도 없는데 어떡할 거야!!! 기내에서 난리 났어 자리 못 바꾼다고! 직원한테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데 안내한 거 맞아?!!”

나 “혼자라고 했단 말이에요.. 물어봤다고요ㅠㅠㅠㅠ”


3. 임산부인 듯 임산부 아닌 형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나는 노이로제에 걸려 모든 비상구 달라는 손님을 집착적으로 취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공손하게..) 신체 건강해 보이는 남녀 두 분을 비상구 자리에 배정해 드리고 일어나 인사드리는 순간, 내 눈에 띈 너무나 불룩했던 여성분의 배.. 왜 처음에 보지를 못했는지. 임산부는 비상구에 절대 앉을 수 없다. 가시던 두 분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나 "(확신에 차서) "앗, 손님 혹시 임신하셨나요?"

여성 "네?? 아닌데요???"


이때 내 심정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짧은 찰나, 속으로 온갖 생각이 지나쳤다. '망했다. 이거 백퍼 클레임이다. 망했다 아오 어떡하지' 위기 속에서 순간적으로 짱구를 굴렸다.


나 "저희 비상구 배정하는 여성분들께는 무조건 여쭤보는 질문인데 아까 제가 누락했어요. 요즘 티 안나는 분들이 워낙 많아요ㅠ 즐거운 여행 하세요!"

여성 "아, 네네"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절차인 마냥 둘러대고 뒤를 도는데 등으로 땀이 주룩 흘렀던 그날의 기억. 아주 공항 근무하면서 천연덕스러움만 늘었다.


셀프 체크인이 대세인 요즘도, 비상구좌석만은 셀프로 탑승권을 받을 수 없다. 비상구 좌석 선택 손님은 직원을 만나야 하며, 직원이 직접 인터뷰 후 탑승권을 발급한다. 그것만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요즘은 비행기 타면 어쩔 수 없이 비상구 앉은 사람 관상부터 따지게 된다. 어쩌다 이런 시대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비상구 손님을 유심히 보며 마음속으로 가벼이 기원한다. 님아, 그 문을 열지 말라고.


우리, 비상구는 비상시에만 열어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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