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얼마 전, 출장으로 일본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 일이다. 200명도 안 되는 작은 비행기에는 온통 엄마 아빠 뻘의 중년 손님들이 빼곡했고,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 혼자는 나뿐이었으니 신기해 보였나 보다. 옆자리 손님의 호기심도 이해되는, 출장지는 일본의 작은 도시였다.
코로나 이후 항공사들은 재빠르게 중단 노선의 운항을 시작했는데, 내가 간 곳도 그중 하나였다. 부재중인 지점장 대행으로 일본->인천의 항공편을 총괄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른바 오퍼레이션(operation) 출장.
항공사에는 이런 오퍼레이션 출장이 많다. 나처럼 지점장 땜빵(?)이나, 부정기/전세기 등의 출장이 그렇다. 부정기/전세기는 보통 기존 운항 중인 노선이 아닌 특수한 지역으로 특정 횟수만 가는 형태의 상품이다. 정기 노선으로 편성해서 정식 지점을 개설하기엔 돈이 안될 것 같지만(!) 인기 있을 시즌에 잠깐 뜨는 이벤트 같은 거랄까. 예를 들면 많은 항공사의 정식 지점이 있는 필리핀의 세부, 마닐라 등은 정규 편이지만, 여름에 잠깐 뜨는 보홀은 지점이 없는 부정기편인 것이다. 또 통째로 한 비행기를 독점하여 승객, 군인이나 기업인들을 수송하는 전세기도 있다. 어떤 기업은 4,5명 타기도 하니 말 그대로 '전세'내는 거다.
작은 비행기라도 어찌나 신경쓸게 많던지
이런 공항에는 해당 항공사 직원/지점/사무실 등이 없으므로 그 항공기를 책임질 매니저를 본사에서 단기 출장을 보내는 식이다. 매니저는 계약 맺은 조업사들이 수속을 똑바로 하는지, 수하물을 잘 싣는지, 기타 조업 특이사항을 지속적으로 본사와 소통한다. 또 틈틈이 승객들이 지점장 나와! 하면 나가기도 하고.. 결국엔 항공기가 정시에 출발할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는, 말 그대로 총괄적 역할이다. (특명! 항공기를 정시에 출발시켜라!)
나는 꽤나 오래 공항조직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출산이니 결혼이니 이러저러한 이유로 입사 13년 만에 오퍼레이션 출장이라는 귀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 저 일하러 가는 거예요~"
"아니, 이 깡시골에 일할 거리가 있어요? 난 여기 골프 치러 자주 오는데 일거리는 없을 텐데.."
'아저씨, 저 사실 이 항공사 직원이에요. 손님이 타고 가는 이 비행기 제가 핸들링하러 가요. 아마 손님이 며칠 뒤에 다시 한국 가실 때 절 보실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가슴에 삼키고 그저 씩 웃었다.
입국장 불이 꺼진 국제선 법무심사대. 하루 한두편 국제선 도착후엔 이렇게 텅 비어버리는 신기한 광경
덜컹, 바퀴가 땅에 닿기 무섭게 나는 얼른 짐을 챙겨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갔다. 나와 인수인계를 할 전임 출장자와 바통터치를 하기 위해서이다.(그는 내가 타고 일본으로 온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저 멀리 한창 승객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없던 출장자(이 또한 공항 선배다)는 날 보곤 어찌나 환하게 웃던지, 아마 100년 전 해방의 앞둔 노예의 표정이 저랬을 거다.
"아싸! 나 이제 간다! 이거 받아!"
내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아닌 공항 임시 패스.
(패스가 있어야 출국장 및 게이트 입장 가능하므로 출장 필수품이다)
"아 선배, 너무 웃는 거 아닙니까?"
"ㅋㅋ뒷일은 맡기고 갑니다~ 나 찾지 말아~"
나랑 손뼉을 마주친 선배는 미련 없이 입고 있던 정장을 훌렁 벗어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눈 깜짝할 새에 삐까뻔쩍한 매니저에서 평범한 손님 1로 변신. 그리고 나와 매니저와의 패스 계승식을 본 눈치 빠른 k-손님들은 어느새 벌떼처럼 몰려들어 아가씨는 뭐 하는 사람인지, 공항에서 맛있는 우동집은 어디인지, 면세점에서 산 술은 갖고 탈 수 있는지 등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