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의 어릴 적 동네
두 번째의 독성항암 6차 중 5번째가 되니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이번 주 내내 힘이 들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실 소파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더군다나 어릴 적 얘기를 꺼내야 하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쉽게 정리가 안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픈 현재의 나를 더더욱 그립게 만든다. 태어나서 얼마 안 돼서부터 중학교 졸업쯤까지 살았던 곳 아쉽게도 지금은 재계발로 사라져 버린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서울전농동의 우리 집.
과거의 나를 이야기를 해야만 현재의 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지금부터 나는 가장 순수했으며 가장 소중했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보려 한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고 나의 아버지는 그 집안의 장남이고 장손이셨다.
당시 머리가 좋고 영특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할아버지의 비뚤어진 부정으로 아들의 모든 행동들에 불만을 가지셨고
두 분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싸우셨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아버지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싸움을 거시며 육두문자를 날리셨고 밤새도록 두부자의 싸움은 끝나질 않았다. 할아버지 당신 스스로 술기운에 지쳐 곯아떨어져야만 싸움이 끝이 났고 그제야 다른 식구들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집안의 제일 어른이며 경제권을 쥐고 계셨던 분이 셨기 때문에 가족 누구도 감히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가족 모두들 할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만 했다.
유년기 때를 생각하면 나는 할인버지가 치가 떨리게 싫었다. 할아버지는 지독히도 독선적이며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셨다. 언제나 하시는 일없이 하루종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었고 입만 열면 육두문자에 어린 나에게는 술과 담배심부름을 시켰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폭력을 행사하셨고 어린 시절 내내 어린 나는 공포 속에 살았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 가족이 살던 작은방 다락으로 올라가 할아버지가 술에 만취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려오거나 부모님이 일이 끝나 돌아오시는 시간에 맞춰 밤늦도록 친구들 집에 서 놀다가 들어와야 했다.
대를 이을 남동생은 애지중지하며 혼내지 않았고 계집아이고 가장 어린 나만 못살게 구셨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커가면서 나는 유독 남자들의 술과 주사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여자를 무시하는듯한 남자들이 있을 시엔 쌈닭처럼 싸웠고 혹시나 나를 얕잡아 볼까 봐 기가 센 여자처럼 행동을 했다. 남자에 대한 나쁜 생각과 지금 현재 나의 모습들이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할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집착은 유달랐던 것 같다 큰고모가 갑작스레 남편과 사별을 하고 막내삼촌도 장가를 가게 된 상황이었을 때도 자식들을 분가시키지 않고 모두 한집에 살게 하셨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5개의 방을 가진 제법 큰집이었다. 우리 가족과 큰 고모네, 막내고모와 결혼한 삼촌식구들 까지 4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았다. 남자어른들과 아이들상으로 큰상 2개가 차려졌으며 여자인 며느리들은 부엌에서 따로 밥을 먹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땐 그게 정상인줄 알았었다. 대충 계산해도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식사시간은 전쟁이었다. 밥을 먹을 때 말을 하면 복 달아난다고 할아버지는 식사 중 대화를 금했다. 할아버지가 첫술을 입에 넣으면 그때부터 소리 없는 전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리다고 챙겨주지 않았고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반찬을 더 먹으려면 빨리 많이 먹어야 했다. 살려고 터득한 생존본능들이다.
어릴 때 나는 지독한 어머니의 껌딱지였으며 울보였다. 밤이면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서 부모님이 주무시던 방으로 몰래 들어가 어머니 발밑에 쪼그리고 잠을 잤으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었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날은 내가 어머니가 일을 보러 나가서 돌아올 때까지 하도 울어 서 아버지가 나를 창밖으로 던지려 했었다고 어른들이 웃으며 얘기를 했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옆을 떠나지 않으려 했고 그 때문에 부모님의 속사정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며 형제간의 이해충돌까지 부모님의 소소한 사건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참으로 많이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으셨으며 싸우지 않으셨고 아버지에 비해 학벌이 뒤처진 어머니를 무시하는 언행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이해 안 되는 무언가를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어머니가 이해하실 때까지 화를 내지 않고 설명해 주셨다. 학력의 차이가 있음에도 어머니를 존중하셨고 사랑하셨다.
어머니옆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나는 유달리 금실이 좋으신 두 분 사이에서 잠이 들었으며 잠을 깨었다.
1남 3녀 중 셋째 딸인 나는 다른 형제자매와는 달리 내성적이고 혼자 노는 것과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학구열이 워낙 많으셨던 아버지는 그런 나를 대견해했으며 예뻐해 주셨다. 워낙 머리가 좋으신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해 기대가 높으셨고 자식들이 따라와 주길 바라셨다. 하지만 기대 와는 달리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공부보다는 노는 걸 좋아했다. 큰언니는 당시 학교 짱으로 싸움도 잘했고 춤도 잘 췄다. 내가 어릴 적 언니들을 집에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노는 게 제일 좋은 언니들은 온종일 집 밖에서 놀았다. 당시고등학교는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큰언니는 공부는커녕 매일 밤늦게 노느라 시험공부는 뒷전이었다. 아버님은 매일 친구들과 어울리는 노는 큰딸의 장래를 염려하셨고 어머니는 사고 친 큰언니의 뒷수습을 하느라 구두티켓을 사들고 백방으로 선생님들을 찾아다녔다. 아버지가 퇴근해서 돌아오기 전까지 큰언니를 찾으러 어머니와 함께 롤라장과 만화방을 뒤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롤러장에선 신나는 팝송과 노래들이 온종일 스피커에서 울렸으며 어린 나도 자유로운 그 분위기가 좋았다. 덕분에 나도 언니핑계를 대면서 롤러를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 기대에 못 미치는 큰딸을 못 미더워하셨고 많이 혼내셨었다. 나에게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였는데 언니에게는 무섭고도 엄한 아버지셨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엔 서울에서도 나무를 떼는 아궁이로 난방과 요리를 했었다. 할머니와 삼촌은 며칠에 한 번씩 집 뒷산에서 나무를 해와서 커다란 검정무쇠솥에 밥을 하였고 그을음과 같이 불꽃이 오르고 매캐한 기름 냄새가 나는 작은 난로처럼 생긴 곤로라는 것에 요리를 했다. 할아버지는 장작으로 불을뗀 가마솥밥만 드시려 했기에 나중에 연탄보일러로 바뀌었을 때도 대문 바로 옆에 장작 가마솥을 따로 만들어서 밥을 하고 국을 끓였고 장을 담글 메주콩을 삶았다. 후각과 청각이 오래간다 했던가 아직도 그 시절 가마솥 밥과 메주콩 삶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커다란 무쇠솥에 삶은 메주콩은 달큼하니 맛있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갔기 때문에 해마다 장 담그는 계절이 돌아오면 온 동네에 콩 삶는 냄새가 퍼졌다. 전라도가 고향이신 할머니는 못하는 음식이 없으셨다. 할머니가 담근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동치미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설날이면 큰 다라에 만두소를 만들어 온종일 온 식구들이 만두를 빚었고 추석 때는 역시 송편을 만들기 위해 산마다 솔잎을 따오고 하루종일 송편을 빚었다. 소고기뭇국에 토란을 넣어서 국을 떠주면 나는 토란의 미끄덩한 질감이 싫어 어머니 그릇에 토란을 다 밀어 넣었다. 간식으로 막걸리로 만드는 술빵과 겨울철 아궁이에 구운 군고구마와 감자 등등 서울에 살았지만 시골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며 자랐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부엌 한편에 커다란 솥에 물을 끓여 빨간 다라에 불을 받아 목욕을 했다. 대중목욕탕을 자주 가지는 못했다. 추운 겨울날 어머님이 목욕물을 받으면 씻기 싫어 요리조리 도망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방과 요리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고 냉장고와 전화. 티브이도 들어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앞산에서 더 이상 나무를 베어오지 않아도 되었지만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연탄을 갈아야 했다. 그때 내 나이가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50여 년 전으다. 서울에 잘 사는 집이야 안 살아 봐서 모르겠지만 우리와 같은 일반집들은 벽마다 빈대가 기어 다니고 아이들 머리에는 이가 바글바글 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 머리를 숙여놓고 이검사를 했을 정도였다. 볕 좋은 날이면 거리마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앉혀놓고 신문지를 깔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면 이와 함께 죽은 알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다 살아서 기어 다니는 이를 발견하면 손톱등으로 꾹 눌러 죽였다. 아이들은 잘 씻지 못해 까맣고 꼬질꼬질했으며 옷소매는 콧물을 하도 닦아서 반질반질했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에는 기생충들이 드글거렸다. 학교에서 채변봉투에 변을 담아가야 하는 날엔 동네 신문지 동이 나는 날이었다. 불과 50여 년 전이다. 그렇게 못살던 시절이지만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되었다.
박정희대통령 때였고 그때 당시 민방위훈련으로 기억하는데 밤에 사이렌이 울리면 서울 전체가 소등을 해야 했다. 야간에 북한에서 적기가 날아올 때 지상에서 보이는 불빛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걸리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통금시간이 있었던 그 시절이었다. 그럴 때면 다들 몰래 불을 켜놓고 불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가리기 위해 이불로 창문을 막았다. 더운 여름날엔 옥수수와 감자를 쪄서 온 가족들 모두 시원한 옥상으로 올라가 지루한 훈련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티브이를 보았다. 그때 제일 인기 있었던 미국드라마가 있었는데 브이라는 드라마였다. 파충류모습을 한 외계인들이 인간인양 정체를 숨기면서 인간을 사육해서 잡아먹는 내용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 드라마를 보면서 무서워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선 궁금함을 못 참고 손가락 사이로 여주인공이 쥐를 삼키는 장면을 보다가 울음을 터트렸었다. 응답하라 1988 때의 시절을 찐으로 살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재미난 어린 시절이었는데 그 순간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