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근탕과 브런치

소주 대신 드셔보세요

by 루하은조안

오늘은 모처럼 이른 퇴근이 될 것 같았다.

여섯 시 반이면 야근에 절은 시계를 기준으로 일찍이다.


'동기들을 불러 모아 소주나 몇 잔 할까'


월요일이면 모이던 이 동기들의 시계도 대충 비슷하게 절어있다.

우리끼리는 시간이 그래서 잘 맞는다.


이른 퇴근을 가로막는 계산 실수는 없었는지

결의에 찬 손으로 계산기를 더듬더듬 찾으니까

낮에 미리 사다가 계산기 위에 올려놓은 갈근탕이 부스럭댄다.

곧 멀리 추운 곳으로 출장을 다녀올 아내의 부탁이었다.

팩으로 된 갈근탕을 딱히 데우거나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식어버리기 전에 집으로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계산은 잘 맞았지만 술냄새는 집으로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집에 와서 가죽 시계를 벗어내니 시간이 남았다.

아내는 이 시간에 내 브런치 프로필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나도 브런치나 해볼까'라고 허공에 툭 던져놓은 말이었는데,

갈근탕을, 브런치를 우리는 서로 건네줬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단지 출산의 도취 속에서만 제 파괴의 광란을 극복한다"


보고서는 술술 써지는 편인데,

어색한 공간에 뭔가를 적어보려는 손끝은 하릴없고

괜히 예전에 몇 번 베껴 써 본 발터벤야민의 문장만 떠올랐다.

술은 명백하게 파괴이고 광란이니까,

오늘은 브런치에 첫 출산을 한 하루로 남겨야겠다.


대학생 시절에 그에 어울리는 체력이 있을 때에는

그 무거운 카메라를 가지고도 힘든 줄은 몰랐다.

찍은 사진이 넘쳐흐르다 보니 그저 그게 아까워서

네이버에 블로그를 꾸며놓고 온종일 글과 사진을 엮어 나갔었다.


구두를 신은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사진 대신 표를 그리고, 여행기 대신 검토서를 올리는 일에 몰두했다.

블로그는 어색하고 엑셀과 워드가 자연스러워질수록

숙취에 시달리는 날도, 스스로에게 건네는 이런저런 핑계도 늘었다.


그렇게 극복하지 못한 광란을 현대 의학용어로 스트레스라고 하나보다.


6년 전에 포기한 일을 지금 다시 시작한들 뭐가 다를까 싶지만,

한 번씩, 술 한잔 대신 글 한쪽 쓴다는 생각으로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한 번의 감기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와이프가 갈근탕을 챙기듯,

나는 내 파괴의 광란을 좀 챙겨봐야겠다.


고금리시대에 술값도 아껴지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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