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문어발2: 해외학교 고3 담임이 되다.
하노이한국국제학교에 초빙을 와서 두 번째 해에는 12학년(고3)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한국의 입시와는 다른 특례 입시를 지도해야 하는 터라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었다.
11학년 때부터 수업을 함께 했던 아이들이라 정도 들고 편한 사이였기 때문에 처음 맡아보는 재외학교 12학년 담임이지만,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이 사항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코로나. 코로나로 인해 한국과 베트남 간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고, 이는 한국으로 건너가 입시를 치러야 하는 하노이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의 통제가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부당함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었다. 외국인인 우리는 상황이 더욱 어려웠다.
일단, 입시는 치러야 했기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열심히 입시 준비는 시켜야 했고, 동시에 학교와 12학년 진학부에서는 한국으로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 곳곳에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재외학교 수험생들은 비행기가 뜨지 않아 입시를 치르지 못하는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이 올 수도 있었기에 긴장감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우선, 하노이 시내가 셧다운이 되고 학교조차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간신히 학교 교사들은 출근을 할 수가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노이에서도 줌으로 온라인 수업이 이루어졌고, 수업은 그렇다 쳐도 입시 상담이 이루어지지 못해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그때, 묘안이 하나 떠올랐으니 밖에서 두 세명 정도는 만날 수 있었기에 학교에 출입이 안 되는 반 아이들을 밖에서 따로 만나 일대일 입시 상담을 진행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진학부장님께서 학교의 허락을 받아 주셨다. 이로써 4명의 12학년 담임들과 진학 부장님은 하노이 시내 곳곳에 있는 카페를 옮겨 다니며 아이들을 만나 극적으로 상담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한 학기가 지나가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나 했지만 여전히 한국으로 오가는 항공편은 없는 상황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띄우기 위한 학교의 노력을 계속됐다. 진학부장님께서 베트남 공관들까지 만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 대학들은 한국에서의 현장 시험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극적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마련할 수 있었고, 우리는 학생들의 비자 및 각종 서류 등을 취합하여 그야말로 몇 백명의 단체 여행을 진행해야 하는 여행사를 방불케 하는 업무를 감당했다.
되돌아보니 그 모든 걸 어떻게 했나 싶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당장 벌어진 일에 대해 수습하고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2학년 학생들이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고 격리를 마친 후 하나둘씩 대학 일정에 맞춰 시험을 치렀다. 평소대로라면 12학년 담임들이 한국으로 출장을 나가 학생들을 격려하고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코로나로 꼼짝없이 하노이에서 카톡 화면만 들여다보며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12년 특례(12년 동안 해외학교 재학)인 학생들은 한국에 나갈 필요가 없었기에 하노이에 남아있었고, 우리 반 아이들은 8명 정도가 이에 해당됐다.
그중 한 녀석은 방학하는 날까지 일관되게 지각을 하셨고, 매일 아침 모닝콜 서비스를 해드렸다.
밉지는 않은 게 넉살이 얼마나 좋은지 지각할 수밖에 없는 신박한 이유를 매일 다르게 늘어놓았고, 교무실 선생님들은 오늘의 사유는 뭘지 그 학생이 교무실에 오기만을 기다릴 지경이었다.
드디어 한국에 나갔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하노이로 돌아왔고, 대학마다 합격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입시 성과는 꽤 훌륭했다. 합격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내가 합격한 것 마냥 아이들과 소리를 지르고 얼싸안고 기뻐했다. 한국에서 고3 담임이 느끼는 짜릿함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모든 입시가 마무리되고 졸업식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하노이 외곽 곳곳으로 체험학습을 가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여행으로 왔다면 절대 가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곳들이었고, 반 아이들도 나도 곧 떠날 하노이에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베트남 남부 일주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 매일 아침 모닝콜 서비스를 해드렸던 우리 반 아이가 마침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동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이민 가방을 입국장까지 무사히 옮겨주었고, 입국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에게 바로 전달되면서 나는 마지막 귀국길을 정말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마지막 한방으로 감동을 주는 모습이 마치 나와 닮아 있었다.
역시 그 담임에 그 학생이다.
이제는 한국 곳곳에 흩어져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 하노이의 뜨거운 정기를 받아 한국에서도 열정적으로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나의 뜨거웠던 2년 간의 베트남 초빙 생활이 마무리 됐고, 여유로움을 찾아 떠난 하노이었으나 단 한순간도 바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바쁨은 나에게 '고단함'이 아닌, '설렘'을 주는 바쁨이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하노이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하노이가 나를 다시 선택해 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