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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1. 2017

"나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남의 인생을 훔친 한 여자, 그리고 지옥행 직행열차: 영화 <화차>

(주의)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사라졌다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


여기 결혼을 약속한 두 남녀, 문호(이선균 분)와 선영(김민희 분)이 있다. 문호는 조용하지만 단아하고 아름다운 약혼녀 선영을 제 목숨보다 사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은 뒤, 선영은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문호는 약혼녀가 갑자기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선영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감당할 수 없는 진실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름도, 과거도, 나이도,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여자. 남을 죽이고 그 인생을 훔쳐 마치 제 것인 양 살아왔던 여자. 그녀의 실체에 가까워져 갈수록, 문호는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물어야만 한다. 그녀는 과연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던 것일까?



지난 2012년 개봉했던 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는 개봉 당시 꽤 충격적인 문제작이었다. 영화의 원작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계의 거장인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로, 90년대 일본 사회의 음울한 시대적 배경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리얼리즘 미스터리극이다. 이 작품은 1990년대 일본이 겪고 있던 '잃어버린 10년'과, 그 때문에 깊어져버린 경제 불황과 사회적 병폐들, 그리고 그 안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는 개인들의 몰락을 미야베 미유키만의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일본 내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받던 작품이다. 이를 한국 사회로, 그것도 2000년대 배경으로 옮겨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원작에서 여주인공 선영(김민희 분)의 극단적 행위들이 설명되고 이해되는 것은 일본 사회의 병폐와 오랜 불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을 2000년대 한국사회라는 새로운 무대로 가지고 오면서 어떻게 잘 그려낼 수 있을지가 감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숙제처럼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감독은 이를 개인의 문제로 승화하여 한국적 정서에 맞게 소화하고자 하였고, 이는 부분적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시도 덕분에 원작이 가지고 있던 사회비판적 시선은 다소 무뎌진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변영주 감독의 이러한 변주로 인하여 <화차>는 주인공 선영(김민희 분)의 상황과 사정에 보다 초점을 맞췄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선영의 상황과 감정이다.


문호(이선균 분)와 선영(김민희 분)에게도 아름다웠던 한 때가 있었다


주인공 선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들에 허덕이고, 점점 더 깊어지는 신용 불량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도망치듯 피한 곳에서 그녀는 첫 번째 남편과 결혼하며 다시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들의 삶을 짓밟으면서 첫 번째 결혼을 망친다. 선영의 아버지는 죽지 않고 행방불명이 된 상태. 법적으로 부모가 행방불명일 때는 자식들이 끝까지 그 빚을 갚아야 하기에, 선영은 빚더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운 삶을 이어간다. 아무리 피하고 도망쳐도 끝까지 그녀를 따라오는 비참한 상황 앞에서 결국 선영은 '하느님이 계시다면 제발 아버지를 죽여 달라'며 울부짖기까지 한다. 끝없이 도망을 치며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선영은 결국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죽여 그 신분을 훔치는 방식을 택한다. 글로 읽었을 때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여겨지는 해결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크린 안에 재현될 때,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에 의해 이 모든 과정과 감정이 생생하게 관객에게 전달될 때, 영화 <화차>는 비로소 설득력을 갖는다. 때문에 영화 <화차>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왜’이다. 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잔인한 상황으로 내몰았는지. 벼랑 끝에 몰린 그녀가 선택한길은 왜 그토록 잔인하고 음울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괴로워할 동안 우리는, 이 사회는 과연 무얼 하고 있었는지.


여주인공 선영(김민희 분)이 여자를 살해한 뒤 겪는 감정들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시체를 보여주지 않음에도 매우 충격적이다


배우 개인의 사생활 문제는 차치하고,이 영화 <화차>는 김민희의 인생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라 해도 손색이 없다. <화차> 이전까지의 김민희와 <화차> 이후의 김민희는 완전히 다르다. 이전까지의 김민희의 모습에서 벗어난, '연기 잘하는' 배우 김민희를 발견하게 해줬던 작품이 바로 영화<화차>다. 약혼자 문호 역의 이선균과 문호를 도와 선영을 찾는 전직 형사 조성하 역시 탁월한 연기력으로 작품을 견인하는 데 힘썼지만,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선영의 삶을 그리고 있기에, 그 중에서도 극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것은 배우 김민희였다. 특히 김민희는 생기없고 희망이 사라진 듯한 어두운 눈빛을 연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녀의 관조적이면서도 처연한 눈빛은 가냘픈 외모와 더불어 외부적 고통에 짓눌리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내는 데 적합하게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그녀는 그런 면모를 여과 없이 발휘하며 한 사람의 배우로서 발돋움했다.


김민희의 이 눈빛은 소름끼치게 대단했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몰린 선영은 살아남기 위해 희생자를 선택하고, 그 여자를 살해해 신분을 위장한다. 그리고 그 꼬리가 밟힐 것 같은 상황이 생기자 또다시 도망치고, 다른 희생자를 찾아 다시 다른 신분으로 위장해 살아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그녀가 선택하는 희생자들 역시 일견 그녀 자신을 닮아있는, 혼자 살아가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희생자들 역시 사회의 소수자 또는 약자라는 사실 또한 굉장히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병든 사회에서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 결국 또다시 약자를 잡아먹어야 한다. 그것이 생존의 길이 아니라 파멸의 길인지도 모른 채로. 그래서 원작의 제목인 '화차'는 작품 속 선영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화차(火車)는 일본 전설 속의 불수레로,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데 쓰인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고 한다. 불타는 수레이기 때문에 한 번 그 위에 올라탄 자는 두 번 다시 내릴 수 없으며, 곧바로 지옥으로 직행해야만 한다고. 선영 역시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지긋지긋한 빚더미와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복한 일상을 꿈꾸며 시작했을지언정, 누군가에게 들키면 또다시 희생자를 찾아 헤매야 하는 지옥행 열차. 그 위에서 몸부림치는 선영의 삶은 비극적이면서도 처연했다. 때문에 선영에게 있어 약혼자 문호(이선균 분)는 그녀가 닿을 수 없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손에 넣어본 적 없는, 한 번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본 적 없는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 동물병원 원장으로 개들을 치료해 주며 말갛게 웃는 그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선영은 마치 아지랑이를 만난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늘 꿈꿔왔으나 꿈꿔왔던 것보다도 더 눈부신 그런 행복. 그러나 지옥행 열차에 올라탄 선영에게 그 행복은 결국 파멸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비극의 시작이었다.  


환하게 웃는 리즈 시절의 솊........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문호는 또다른 살인을 준비하고 있던 선영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선영을 잡기 위해 종근(조성하 분)을 비롯한 경찰들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 그녀를 마주하고 문호는 수많은 질문들 대신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느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선영은 문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답을 내놓는다.

그녀의 입은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선영이 문호를 사랑했었노라고 믿었다. 선영에게 있어 문호는 단순히 사람 혹은 남자의 의미라기보다는, 선영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평범한 행복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행복을 바라다 결국 처한 자신의 상황이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에 뛰어든 불나방처럼 느껴져,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불마차에 올라타 있다고 여겨져 결국 그런 답을 내놓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살함으로써 지옥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화차> 개봉 당시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싸이코패스의 살인행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들도 존재했었고, 범죄 그 자체를 미화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은 존재할 수 없다는 비판 역시도 존재했었다. 일견 맞는 이야기들이고, 나 역시도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같은 상황에 놓인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선영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만일 내가 선영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그런 선택을 절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그러진 사회 현실 속에 놓인 개인이 어디까지 처참해 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선택 속에서 스스로를 어디까지 망가트릴 수 있는지를 미스터리 스릴러를 통해 충실히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봉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그때와 지금의 서울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피폐하고 팍팍해져만 가는 사회 현실 앞에서 우리의 삶을,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작품. 배우들의 열연만으로도 다시 한번 복습할 가치가 충분한 영화다. 이번 주말, 한번쯤 다시 이 영화를 꺼내 곱씹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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