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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7. 2017

그래, 나는 살아남았다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에 부쳐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나는 학교 앞에서 홀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집과 학교가 멀다는 이유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오가며 고생을 할까봐 부모님께서 특별히 배려를 해 주신 덕이었다. 처음에는 그 배려가 무작정 좋았다. 엄격했던 집안 분위기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학교와 집이 가까우니 중간 중간 와서 쉬어도 되는 나만의 아지트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여전히 딸의 거취 문제를 신경쓰셨다. 저녁이 되면 나는, 현재 위치가 어디며 언제까지 집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보고해야만 했다. 그 일과가 때로 무척 번거로웠지만, 작년 이맘때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를 듣고 나는 다소간 부모님이 현명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 사건에 대한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자취방에 홀로 있었다. 


아직도 그 뉴스를 처음 들었던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귀가 먹먹했다. 말 그대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쇼킹한 뉴스는 곧바로 네이버 검색어 1위를 기록했고, 그 새벽이 다 지나는 내내 순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언론사들은 충격적인 뉴스를 시간 단위로 보도했다. 사건의 최초 발견자가 남자친구였다가, 친구였다가, 다시 아니라고 하기도 했고 여자가 술을 마셨다고 했다가 또 아니라고 했다가, 이런 저런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뉴스들이 어지럽게 타임라인을 도배했다. 그러나 그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사건이 '강남역' 한복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전까지 우리에게 강남역이란 - 사람들로 가득찬, 사각지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 그래서 어쩌면 사고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장소였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는 뉴스보다는, 어딘가 허름한 동네 뒷골목에서 여성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더 그럴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이 강남역에서 벌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모두 공포에 떨어야 했다. 더 이상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모두를 끔찍하게 덮쳤고, 그 끔찍함은 지금껏 겪어왔던 수많은 일들에 비춰 보았을 때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더욱 이 사건에 공감했던 이유는 그저 그 피해자가 여성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평소에 겪어왔던 수많은 직간접적 폭력들과 - 가정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일터로부터 - 그 폭력들을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왔던 시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삶의 수많은 순간에 그런 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로 폭력의 가해자는 부모가 되기도 하고, 옆집 아저씨가 되기도 하고, 헬멧을 쓴 배달원이 되기도 하고, 직장 상사가 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시간들 동안 피해자의 잘못은 없었다. 그저 신체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당했던 수많은 폭력들을 반추하며 우리는 이 사건 앞에서 분노했다. 그리고 그 폭력들이 이제는 우리의 생활공간까지, 일상생활까지 침범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괴로워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 사건이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1년. 아직도 살 날이 많았던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꼬박 1년이 되었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꿈 많던 청춘의 그녀가 만일 그날 약속을 취소했더라면, 아니면 강남역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지인들을 만났더라면, 그도 아니라면 넓디넓은 강남역 다른 건물에서 다른 음식을 먹었더라면,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늘 드는 생각의 끝은 그녀 아닌 다른 여성이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은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저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녀의 죽음에는 그녀의 잘못은 없다. 오로지 우리 모두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그 피해자는 아마 내가 되었을 것이라고, 늘 그렇게 되새기고 있다. 그래서 늘 무섭고 아직도 두렵다.   


사건이 일어난 지 일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바뀌었으나 바뀌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그대로 흘렀고 꽤 많은 이들은 아마도 이 사건을 잊었을 것이다. 매일 강남역을 지나가는 나조차도 이 사건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 1주기를 맞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또다시 많은 포스트잇이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내심 안도했다. 잊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이제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안도했다. 


세상에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잊혀진다고 해서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많이 얘기하고, 더 크게 얘기하고, 그래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오늘은 1주기다. 아직 1주기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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