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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21. 2017

박열과 후미코, 미친 세상에 돌을 던지다

조선과 일본의 두 아나키스트, 영화 <박열>

주의!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런 영화 아니냐고?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항일운동을 펼치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 구조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약간의 허구를 가미하여 영화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해방 이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시도되어 왔다. 때문에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일각에서는 '또 그런 뻔한 민족주의 영화의 일종 아니냐'는 회의적 시각이 있기도 했다. 헌데 뚜껑을 열어 보니 이 영화, 어딘가 골 때린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라는 사실이 또 한번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점잖고 의로운 독립투사가 아닌,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영화.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또 다른 인물들에 대한 영화. 영화 <박열>은 스스로 '개새끼'임을 자처하고 아나키스트임을 공표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영화다.


조선의 아나키스트와 일본의 아나키스트

일본 제국을 강타한 사상 초유의 스캔들

1923년, 간토 지방을 뒤흔든 간토(관동)대지진 이후 괴소문이 퍼져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된다. 이 어마어마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수 있는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 내각은 도쿄에서 '불령사'라는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고 있던 조선 청년 박열(이제훈 분)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그러나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한다. 과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그보다도 박열과 후미코가 일본 내각에 날릴 통쾌한 한 방은 무엇일까.  


박열은 실제로도 독특한 인물이었다고.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투옥 당시 스물 두 살이었다는 박열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영화의 독특한 색깔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박열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똘끼'를 엿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독립투사라는 수식어도 새롭지만, 그보다 불의나 폭력 앞에서 이 인물이 보이는 행동들은 더욱 새롭다. 그는 독립 운동 군자금을 빼돌린 지식인의 뒤를 밟아 린치를 가하고, 가게에 찾아와 조선인을 조롱하는 일본 무사들에게 다짜고짜 식칼을 휘두른다. 일견 무식하게 폭력을 자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것은 언제 어디서든 당당한 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박열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는다. 투옥되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것도 일본 정부가 꾸민 것보다 더 큰 죄를! 이를 지켜보던 관객이 박열이 그저 허풍이 심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허황된 이상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즈음, 영화는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슬그머니 풀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본 그 어떤 여성 캐릭터보다도 멋있었던 가네코 후미코


나는 박열의 과외선생이다

사실 주인공 박열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은 가네코 후미코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박열과 같은 사상을 가진 동지로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배우자로 그려지는데, 최근 영화 속에서 보기 드문 진취적인 여성상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가네코 후미코를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때로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을 못하는 박열을 호되게 가르치기도 하고, 뭇 남성들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박열이 투옥될 때 스스로 그의 동지임을 자처하며 함께 투옥헤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할 정도다. 후미코라는 인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민중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깨부순다. 아니, 그녀를 통해 우리는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본 적 없던 일본 민중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그만큼 영화 속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보여주는 파격은 '조선의 제일가는 불량선인'이었던 박열이 보여주는 파격을 때때로 뛰어넘는다. 특히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얼마나 독특한 인물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옥중에서 찍었던 사진을 통해서도 분명히 느껴지는데, 이 사진 한 장이 당시 사회에 던졌을 파급력은 가히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박열과 후미코. 실제 사진과 동일한 포즈로 촬영했다고. 이들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주는 사진이다.

영화 속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동거를 시작하면서 동거 서약 세 가지를 세운다. 이들의 동거 서약을 보면 그들이 서로를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박열과 후미코가 그 시대에 얼마나 독특한 인물이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특히나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동거 서약은 파격적이면서도 새롭다. 그러나 뒤집으면, 이런 동거 서약과 같이 아주 당연한 가치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을 말해주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함에도,  일본인과 조선인 간 민족 차별이 당연했던 당시 사회.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조선인 6천여 명이 살해당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당시 사회. 그리고 잔인한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박열과 후미코의 죄를 꾸며 재판을 집행했던 당시의 현실. 박열과 후미코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1. 동지로서 동거한다.
1. 운동활동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1. 일방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을 잡는 경우, 공동생활을 그만둔다.
박열이 쓴 시. 후미코는 이 시를 읽고 박열의 사상에 반했다고.

영화적 상상력과 역사

영화는 상당 부분 실제 역사에 충실했고, 중간 중간 빈 부분들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웠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알고 나면 놀랄 만큼 영화는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때문에 이런 행동들은 영화적 상상력이거나 허구겠지 생각할 만한 장면들 역시도 실제 일어났던 사건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화 <박열>은 너무 과하게 감정을 고조하지도, 그렇다고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사극 전문 감독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준익 감독다운 노련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낼 만한 부분들이 꽤 있었으나, 감독은 과장된 감정을 배제해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다 맛깔나게 살려냈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일본을 악으로, 조선을 선으로 묘사하여 애국심을 자아내는 연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이를 비껴나가 더 큰 본질에 대하여 묻고 있다. 오히려 애국심이나 국가 같은 것들의 의미보다는,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박열과 후미코 두 캐릭터를 통해 끊임없이 전달한다.

모든 일본인이 악인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물이 단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일본인이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기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흔히 등장했던 일본인 캐릭터들은 총독, 군부, 순사 또는 자경단과 같이 권력을 부당하게 휘두르는 악으로 그려져 왔다. 암살에서처럼 아주 가끔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인들을 돕는 캐릭터가 하나 정도는 등장하지만, 그의 비중은 크지 않고 오히려 악한 일본인의 캐릭터에 보다 초점을 맞춘 영화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박열>은 다양한 군상을 한데 담아 보여주려 했다.

영화 속 일본인들은 단편적 인물로 묘사되지 않고, 다양한 면모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일본과 일왕에 대한 충성도가 강했던 간수나 예심판사와 같은 캐릭터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극 초반 박열 및 후미코와 대립하며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갈등 요소로 소개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에 감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기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두 사람.

영화 <박열>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 속 박열의 나이가 고작 스물 두 살, 그리고 후미코의 나이가 고작 스물 한 살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리고 동시에, 고작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불합리한 상황과 더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회를 비판하고 기존의 생각들을 깨부수고, 동시에 더 중요한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를 지켜내고자 했던 박열과 후미코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주목할 만 하다. 아니, 주목해야만 한다. 시대를 살아냈던 두 젊은이들이 자신의 열정과 젊음과, 때로는 목숨을 바쳐 지켜냈던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의 짜임새나 연출 역시도 훌륭하지만, 박열과 후미코라는 캐릭터를 연기해 낸 이제훈과 최희서의 연기 역시도 매우 돋보인다. 특히 신예 배우 최희서는 실제 일본인이 아닌가 의심할 만큼 맛깔 나는 일본어 연기를 선보이고, 이제훈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감정선을 통해 박열이라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 외에 김인우, 권율, 민진웅 등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해 영화에 감칠맛을 더한다. 올 여름, 극장가에서 영화 <박열>이 과연 어떤 성적을 거두게 될 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우리가 잊고 있던,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냈던 젊은 청춘들에 대한 영화. 6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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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오마이뉴스'에도 기사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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