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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r 22. 2019

대배우들의 영화 <우상>, 그럼에도 물음표가 붙는 이유

영화 <우상> 내맘대로 리뷰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므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날의 사고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영화 <우상>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 이름만으로도 많은 것이 설명되는 세 배우가 한 작품 내에서 호흡을 맞춘다는 소식이 처음 들렸을 때, 수많은 영화팬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아, 엄청난 작품이 또다시 탄생하겠구나. 선 굵은 연기의 대가인 두 남성 배우와 한창 충무로를 뒤흔들고 있는 여성 배우의 조합이 작품에 어떤 시너지를 가져올지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보니 이 영화, 어딘가 많이 불편하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불편한지를 설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영화 <우상>은 많이 불편한 작품이다. 최근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 공식 초청되며 전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일반 관객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이 불편한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많이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작품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화 <우상> 줄거리 요약

청렴한 도덕성으로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차기 도지사로 주목받고 있는 도의원 구명회(한석규). 어느 날 명회는 자신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집으로 가져온 사실을 알게 된다. 스스로의 정치 인생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그는 아들을 자수하게 만든다. 한편 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 부남을 키우고 있는 유중식(설경구)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아버지다. 어느 날 자신의 전부인 아들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해 싸늘한 시체로 돌아오고, 그는 사고 당일 아들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사고 당일 중식의 아들 부남은 며느리 최련화(천우희)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났었지만, 그날 밤 사고의 진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련화는 증발한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 중식은 그녀를 찾기 위해 경찰에 도움을 청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기 위해 중식은 홀로 사고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우상'은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뜻한다. 이 단어는 독특하게도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를 담고 있다. 자신이 되고 싶고 선망하는 모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적인 오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욕망하고 선망하는 모습이 동시에 잘못된 판단에서 기인한 일그러진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우상이라는 단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을 꽤나 잘 묘사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영화 <우상>은 세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그들이 각자의 <우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담았다.



거짓은 입으로 퍼진다, 권력을 향한 욕망을 대표하는 인물 '구명회'


도의원 구명회는 권력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일반적으로 정치 스릴러 속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한데, 감독은 이 캐릭터에게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적 속성을 부여해 식상함을 다소 해소해보고자 했다. 극 중에서 구명회는 조심성이 많고, 청렴결백한 모습에 극도로 집착한다. 그가 자동차 창문에 붙은 찌라시를 제거하고자 집착하는 모습이 계속 나오기도 하고, 경찰이 혈흔 한 방울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아예 집 안 자체를 공사하는 조심성을 보여주기까지 하는데, 첫 살인이라는 점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치밀한 그의 행동에서 캐릭터의 성격이 짐작된다. 그는 이 청렴결백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망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기까지 한다. 아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등장한 망상은 굉장히 상징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 아들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아들이었다가, 스스로였다가, 죽은 부남이었다가, 자신이 살해한 심부름센터 직원이 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명회는 손에 온통 피를 묻힌 채 울부짖는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오마주한 듯한 이 장면은 그의 죄책감을 나타내는 동시에, 명회가 출세에 대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구명회는 속과 다른 겉을 내보이고 사는 정치인이다. 청렴결백의 아이콘인 그는 실은, 스스로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아들 따위는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살인범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심지어는 어머니와 아내까지도 어렵지 않게 희생시키는 그의 삶은 말하자면 그 자체로 빈껍데기에 불과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열광하고, 명회를 선망하고 사랑한다. 큰 화상을 입고 혀까지 눌어붙어 제대로 말도 할 수 없게 된 명회가 마지막 장면에서 괴성을 지르며 알 수 없는 내용의 연설을 할 때, 영화는 어떤 자막이나 설명도 붙이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보는 청중들을 와이드에서 클로즈업으로 천천히 잡아낸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연설을 들으며 청중들은 여전히 그를 뜨겁게 사랑하고 선망한다. 그는 세 캐릭터 중에서 유일하게, 그 자체로 <우상>이 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믿음은 귀를 막는다, 맹목적 부성애를 가진 주인공 '유중식'

중식은 아들에 대한 맹목적 사랑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다. 그가 어떻게 해서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과 둘이서만 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지만, 아주 옛날부터 그렇게 둘만 살았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성적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면 보다 못한 그가 그것을 해소하도록 도와주었고, 그것이 견디기 어려워 업소를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중식의 나레이션은 영화 속에 두 번이나 등장한다. 이는 아들에 대한 중식의 집착과 애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 중 하나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그는 고통에 울부짖는 아비의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하나뿐인 핏줄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이는 모습은 사실 부성애로 가득 찬 여타의 아버지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며느리인 련화가 임신을 했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본인의 아들 부남이 아닌 사실을 알고도 련화를 찾아다니고, 2천만원을 써가면서까지 련화를 찾아내어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장면은 '일반적인' 시아버지의 모습을 한참 벗어난 부분이다.



그의 성장배경이나 환경에 대해 설명된 것이 영화 속에 많지 않아서, 주관적인 해석으로 짐작컨대 그는 가족 혹은 본인의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 집착은 장애를 가진 아이를 홀로 키우는 그를 지탱해 준 지지대이자, 그의 삶에 이유를 부여한 유일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를 설명하고 구성하는 모든 것인 아들이 사라짐으로써, 그는 울부짖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곧 며느리 련화가 임신했다는 사실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는다. 아들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굴던 그가 시체 유기 혐의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련화를 지키기 위해 이를 덮는 장면은 그의 집착이 아들에서 련화의 임신 사실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씬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족 혹은 그가 지켜줄 수 있는 '누군가'였던 셈. 그렇게 그 집착은 그의 눈과 귀를 가리고, 며느리 련화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 어느 것에도 귀기울이지 않도록 그를 몰아붙였다. 때문에 일련의 과정을 통해 련화가 사산하자, 삶의 모든 것을 잃은 중식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명회에게 복수를 행하기에 이른다. 복수에 성공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감옥이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어쩐지 쓸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바램은 눈을 가린다, 생존만이 목표였던 주인공 '최련화'


영화의 반전을 안고 있는 인물인 련화는 생존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 생존을 위해 연변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그녀는 밑바닥 인생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연변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을지, 그리고 그 우여곡절이 련화 안에 어떤 것으로 자리잡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련화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녀가 살아남는 방법은 한국 사람과 혼인신고를 해서 한국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래 살아남는 것밖에 없다. 련화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과 결혼을 전전하고, 업소에서 일하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그게 살인일지라도. 명회에 의해 납치되어 온몽이 묶여 있었을 때 그녀가 보여준 처참한 모습은 '살아남고 싶다'는 련화의 욕망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 말미에서 련화는 다른 두 캐릭터와는 다르게 스스로의 '우상'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한국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던 련화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이미 혼인신고서까지 손에 넣었다. 그런데 영화 후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살인범이 되고,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저 도망쳤으면 되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련화는 도망치지 않고 중식과 자신의 복수를 명회에게 하는 길을 택한다. 복수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굳이 중식을 찾아가 '약속은 지킨다'라는 말을 남기고 련화는 복수를 하러 떠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되는 부분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련화의 생존본능에 위협을 가한 것이 명회이고,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련화가 명회를 죽이러, 혹은 명회에게 복수를 하러 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석하기에는 마지막에 가스를 열어 모두가 죽는 방식을 택한 련화의 행동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일견 자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으나, 맹목적인 중식의 보살핌 때문에 련화가 아주 조금 변했고, 마지막 남은 인간성의 말로를 끌어올려 중식의 복수를 대신 해줬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극 중에서 세 인물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했고, 그 결과 영화의 막바지까지 치닫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 말미, 우상을 뒤쫓던 세 사람은 서로에 의해 모든 것을 잃었으며, 모든 것이 피폐해졌으나, 련화는 죽었고 중식은 감옥에 갇혔고 오직 <우상>이 된 명회만이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세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세 배우 모두가 열연을 펼쳤고,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세 배우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배우 천우희의 발음을 알아듣기가 다소 힘들다는 불평이 있기도 했었는데, 실제 영화관에서 보니 연변 출신으로 심한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캐릭터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하는 모든 단어를 알아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것마저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다만 배우 천우희의 평소 연기를 보아왔던 관객들이라면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일부 인터뷰에서 감독이 지적했듯, 극의 흐름을 따라잡는 데 그녀의 모든 대사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이해할 필요는 없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지점이다.  



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불편하다. 극 속에서 살인은 개인이 우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매개체로 사용됐다. 그래서 영화 내내 잔인하고 끔찍한 살해 장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영화를 끝까지 보기가 일견 거북할 수도 있는 장면들도 다수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등장인물들을 바닥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감독이 살인을 그 수단으로 선택한 지점은 이해가 가지만, 중후반부로 가면서 살인이라는 소재를 남발하는 바람에 죽음이 가지는 무게감 자체가 희박해져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하는 죽음들은 그렇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불필요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앞서 언급한 훌륭한 세 배우들의 연기는 두드러지지만, 일부 배우들의 연기는 보기에 약간 거북한 지점이 있다. 특히 구명회의 부인으로 나오는 배우의 연기는 극 중간중간 몰입을 해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일부 배우들의 연기도 어색한 부분이 있어 세 배우가 쌓아올린 극의 분위기를 해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극을 끌어가는 데 주연 배우들 뿐 아니라 조연의 역할 역시 지대한데,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조금 미흡한 지점이 있었던 것은 아쉬운 연출을 만드는 데 다소간 악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최근 <SKY캐슬>로 인지도를 쌓은 조병규 배우의 등장은 반갑게 느껴졌는데, 짧은 등장이었지만 향후 그의 필모그래피가 기대될 만큼 인상적인 부분도 있었다.   



영화는 매우 불친절하다. 러닝타임 내내 수많은 떡밥을 던지지만 어느 것 하나도 명쾌하게 회수하는 것이 없다. 명회의 아들은 련화를 보지 못했냐는 말에 왜 뭐라도 아는 사람처럼 웃었는지, 목격자 할아버지는 왜 현장에서 중식을 목격했다고 말했는지, 련화의 전남편을 살해한 사람은 그래서 누구인지, 련화를 죽이러 연변에서 넘어온 남자는 왜 중식의 뒤를 밟고 있었는지, 그리고 명회는 심부름센터 직원은 죽였으면서 련화는 왜 죽이지 않았는지 등등. 이런 부분들이 맥거핀으로 기능하며 상상의 가능성을 남겨놓는 장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작품 내에서 이 많은 부분들이 설명되지 않음으로써 영화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관객들을 만드는 데에도 한 몫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많은 관객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을 온전히 관객들의 몫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주제의식을 풀어낼지를 조금 더 고민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세 배우들이 연기한 주인공들의 배경이 전혀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만으로 그들의 욕망과 목적을 추리해 내야만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가장 불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일부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관객이 캐릭터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관조하기 바랬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관조의 과정을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 그것마저 관객의 몫으로 두고 싶었다고 한다면, 그 부분에서는 성공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다만 <한공주>를 연출했던 이수진 감독이 식상해 보일 수 있는 정치 스릴러 소재를 신선하게 비틀어 냈다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도 좋지만 관객과의 소통에도 조금 힘을 더 실어 주심이 어떨런지. 추후 새 작품을 조금은 기대해 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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