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이스(Vice)> 내맘대로 리뷰
이 리뷰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므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9/11 테러가 있었던 해, 세상은 온통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떠들어댔다. 누군가는 그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고, 누군가는 삶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희망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를 바꿀 기회를 엿본 남자가 있다. 이 영화, <바이스(Vice)> 는 바로 그 남자, ‘딕 체니(Dick Cheney)’ 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공화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대기업의 CEO에서 펜타곤의 수장을 거쳐 미국 부통령에까지 오른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 부통령 재임 시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가 내린 결정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꿨고, 뒤바뀐 역사는 수천수만의 삶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영화는 그가 바꾼 역사의 변곡점들을 추적하며, 그의 결정들이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관조적 시점으로 추적해 나간다.
이 작품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9/11 테러, 이라크 전쟁을 비롯, 크고 작은 미국의 현대 정치사를 블랙 코미디의 관점에서 잘 버무려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중간중간 터지는 미국식 유머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인서트들 때문에 첫인상은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인서트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담고자 했던 감독의 섬세한 연출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딕 체니는 태생부터 소위 말하는 '인텔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시궁창에 빠진 듯 엉망진창이었던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여자 친구였던, 후에 아내가 된 린 체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은 음주운전 전력이 2차례나 있던 동네 건달이 어떻게 해서 백악관에 부통령으로 입성하게 되었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인생이 어떻게 성공하였는가를 그리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딕 체니의 삶을 따라가면서도, 딕 체니의 입장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상태에서 영화가 전개되는데, 그 위에 누구인지 모르는 어떤 젊은 남자의 내레이션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영화 제목인 ‘바이스(Vice)’는 부통령을 의미하는 ‘vice president’에서 나왔지만, vice라는 단어는 악덕, 악행 또는 범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실제 부통령의 지위에까지 오른 그가, 자신이 얻게 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의미의 vice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영화 내내 묘사된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동안 딕 체니는 역설적이게도 딸을 위해 자신의 정치인생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족을 위해 정치인이 되었고, 가족을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 인생도 희생할 수 있었던 한 남자. 그런 사람이 어떻게 9/11 테러에 이어 이라크 전쟁까지, 수백 수천만의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는 괴물로 변하게 되었는지가 블랙 코미디와 함께 묘사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들어 딕 체니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자 그의 인생 정점이었던 부통령 시절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 작품은 당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동반하였는지를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쟁 그 자체는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수많은 인권 침해와 살인, 고문, 그리고 무고한 자들의 희생이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는지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의문을 던진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이 모든 것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집중된 권력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가? 그는 정말 악이었는가? 그리고, 유권자인 우리는 과연 이 상황을 선택한 것인가, 관조한 것인가?
낚시를 할 때는, 물고기들이 원하는 것을 주라.
- 영화 <바이스(Vice)> 중에서
영화 속 내레이션을 하는 남자는 딕 체니에게 특별한 '슈퍼파워'가 있다는 멘트를 던진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마치 말이 되는 이야기처럼 포장하고, 그 말들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믿고, 그를 신뢰하고 따른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교묘하게 할용해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체가 그의 권력이자, 그가 목표하는 권력을 얻게끔 도와주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딕 체니에게 그런 권력을 쥐어준 것은 결국 그의 말에 귀기울인 '사람들', 즉 우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영화를 보면서 분석해 볼 만한 포인트들은 꽤 많다. 우선 딕 체니의 젊은 시절인 70~80년대, 여성 인권 및 소수자 인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당시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린 체니의 캐릭터 자체도 굉장히 흥미롭다.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출세할 수 없고 좋은 학교를 갈 수도 없었던 그녀가, 본인의 삶을 대신 살아줄 대체제로 딕 체니를 선택해 그를 뒷바라지한다는 설정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 중 하나다. 이 외에 급변하는 현대 정치사에서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고자 했던 공화당의 정치인들이 변화의 흐름 앞에서도 어떻게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했는지, 그리고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경이롭다. 특히 주연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는 완벽 그 자체다. 사전에 크리스찬 베일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화관에 방문한다면, 딕 체니 역할을 하고 있는 저 뚱뚱한 배우가 대체 누구인지를 한참이나 고민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크리스찬 베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갔음에도 도대체 저 배우가 누구인지가 고민되기 때문. 목소리부터 외양, 그리고 사소한 버릇이나 표정까지, 크리스찬 베일은 딕 체니라는 실존인물의 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여타 작품에서 캐릭터에 몰입하게 위해 고무줄같이 몸무게를 늘였다 줄였다 했던 그의 전적을 알고 있는 영화팬들에게는 그의 변신이 그다지 놀랍지 않을 수도 있겠다. 작품에서 또 한 번 연기 변신에 성공한 크리스찬 베일과,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남편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심지 곧은 여인으로 변신한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만듦새 자체만으로 보자면, 이 작품은 꽤 괜찮은 영화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블랙 코미디 요소나 독특한 연출 기법들은 꽤 마음에 들 정도. 엔딩 장면에서 주는 임팩트까지도 의미심장해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진 점을 제외하자면 이 영화는 꽤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마냥 유쾌하게 웃고만 나올 수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지독한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잘 그려낸 작품. 4월 11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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