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Jun 04. 2019

그들이 꿈꾸던 다른 세상, 연극 <어나더 컨트리>

연극 <어나더 컨트리> 내맘대로 리뷰 

누구나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도 있고, 

신념을 끝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거나 현실의 거대한 벽에 막혀 스러진 경우도 있다. 


이 연극은 열정적이던 시절, 체제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다른 것들을 꿈꾸게 된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Another Country)'는 1930년대 상류층 자제들이 모인 영국의 공립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권위적인 체제를 가지고 학생들을 억압하는 남성 기숙사가 그 배경. 그 안에서 어린 학생들은 서로를 억압하고 서로를 통제하며 체제에 길들여지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 중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가이 베넷'과 마르크스주의자인 '토미 저드'는 학교의 이단아와 같은 존재다. 학교의 명예와 기숙사의 규율에 맹목적인 선도부 파울러는 이 둘을 눈엣가시로 여긴다. 

어느 날, 마티노라는 학생이 다른 남학생과 성관계를 하는 모습을 선생님에게 들키고, 그 이후 목을 매는 사건이 발생한다. 학교에서 마티노와 유일하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던 가이를 비롯, 많은 학생들이 그 사건으로 인해 마음의 파장을 겪는다. 한편 토미는 마티노가 학교의 강압적인 체제에 희생되었다고 믿는다. 이후 반장인 파울러와 사교클럽 '투웬티투(22)'의 학생들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마무리하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가이와 토미를 이용자고자 하는 각자만의 계획을 세운다. 다음 차기 학생회 자리를 놓고 가이 베넷이 거론되던 중, 가이 베넷은 제임스 하코트와의 밀회가 탄로나며 후보에서 제외된다.


이 작품은 1984년 콜린 퍼스가 열연한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적 있으며, 국내에는 이번이 초연이다. 1930년대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2019년 현대의 관객들에 눈에는 부조리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다. 해당 시기에는 그것이 정당화되고 합리화되었을지라도, 거의 90여년이 지난 현재에서 학생들이 서로를 체벌하고 억압하는 모습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이는 학교와 기숙사라는 갇힌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더욱 상징적이다.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사라지고, 상급생은 하급생을 마치 노예나 하인 대하듯 부리며, 학교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체벌이 가해지는 사회. 이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역시 그 군국주의적 사회를 겪어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9년 현대의 관객들이 이 연극을 봐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객은 극의 흐름 속에서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청년들의 신념들이 어떤 계기를 거쳐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이와 토미는 학교가 제공하던 미래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무너졌음을 깨닫는다. 이 학교를 졸업한다면 가이가 원했던 '프랑스 대사'가 되는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학교의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동조하여 본인들의 신념은 잠시 저버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니 이 모든 것은 결국 겉치장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 둘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이는 토미의 ‘자본론’ 책을 집어들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멋질까?’



배우들의 열연은 매우 훌륭하다. 가이 베넷 역을 맡은 박은석 배우는 그야말로 찰떡인 캐릭터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유롭고 익살맞은 캐릭터를 무대 위에서 100퍼센트로 펼쳐 보인다. 그의 전작 <히스토리 보이즈>에서도 잠시 엿보았던 박은석만의 매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최대한으로 발휘되고 있다. 이 외 토미 저드 역을 맡은 이충주 배우나, 바클레이, 멘지스, 파울러 등 서브 캐릭터들을 맡은 배우들의 열연 또한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 이들의 연기가 워낙 훌륭하여 11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다. 대학로 유니플렉스 대극장에서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이라면 소극장 연극과 다른 현장감에 약간 실망할 수도 있다. 다만 배우들의 호흡이 워낙 좋아서, 장소에 대한 아쉬움은 차치하고라도 작품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흡입력이 있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극의 구성이나 호흡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연성 측면에서 엔딩 장면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가이 베넷이 그래서 어떻게 스파이가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되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작품은 졸업 이후의 상황보다는 가이와 토미가 겪은 일련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신념이 어떻게 변화를 겪었는가에 중점을 두고자 하였으나, 신념에의 충돌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결말로 치달았는가를 보다 친절하게 보여줬더라면 더 많은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 일부 아쉬움이 있음에도, 연극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매력들을 잘 살려낸 작품임에는 동의한다. 다만 작품의 주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보다 강렬한 장치가 한둘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함께 남아있다. <어나더 컨트리>는 5월 22일부터 8월 11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관객들을 만날 예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