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고 나니 보이는 것들_프롤로그
눈을 떴다. 낯선 천장, 희미한 불빛, 그리고 의료진의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다리를 들어보세요. 팔을 들어보세요.”
나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두 눈에 플래시 불빛이 비쳤고, 몸의 반응을 확인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 내 몸이 심각하게 다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기억의 마지막은 충청남도 논산 ‘송국농원’. 퇴직 사우들의 삶을 소개하는 사우회보 취재 중이었다. 여수 MBC 사장을 지낸 송원근 사우가 고향 땅에 10여만 평 농원을 일구며 나무를 심고 도서관을 세운 이야기를 듣고, 야산을 함께 걸었다. 거기까지가 네 기억이다.
그 다음은 남들이 전해준 이야기다. 낙엽더미에 미끄러져 비탈길을 굴렀다고 합니다.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나를 송 사장이 인공호흡으로 살렸고, 119 구조대가 백제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CT 촬영 결과는 외상성 뇌출혈. 곧바로 여의도성모병원 중환자실로 긴급 전원되어 집중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42일을 병상에서 보냈습니다. 여섯 명이 머무는 병실 한편,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공간에서 간병사와 둘이 지냈습니다. 밤이 되면 잠을 청하기 어려웠습니다. 새벽 두세 시쯤 깨어나 어둠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스마트폰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을 브런치스토리에 올리고,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으로 지인들에게 나누었습니다. 하루 한 편, 많을 땐 두 편도 썼습니다.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느낀 것들을 끄적였습니다. 쓰면 쓸수록 또 다른 이야기가 샘솟았습니다. 말로는 하지 못했을 감정들이 글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글쓰기는 제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사람은 결국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을 병상에서 절감했습니다.
퇴원 후 첫 주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낯선 일상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글의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신체적으로 남들보다 한 걸음 뒤처질 수밖에 없는 내 삶. 그 느림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한 걸음 뒤에서 보이는 것들’이라는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더 넓고 깊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은 제목이 바로 『겪고 보니, 보이는 것들』입니다. 겪고 보니 달리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먼저 겪은 분들의 아픔이 보이고, 아직 겪지 않은 분들의 마음도 보였습니다. 그 사이에 선 나의 이야기. 이 연재를 통해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내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은 허무하다는 얘기를 하겠지요.” 허무,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허무 속에서 ‘받아들임’도 배웠습니다. 겪고 나니, 다르게 보입니다. 세상도, 사람도.
쓰러진 자리에서 시작된 글, 그 느림 속에서 삶이 다시 보였습니다.
『겪고 보니, 보이는 것들』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해, 결국 인간이라
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