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도전
감독관이 응시표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응시 지역이… 대전으로 되어 있는데요.”
김현영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 해졌다. 시험장은 서울이었다. 대전에 살면서 서울 지방직 시험 원서를 넣으며 ‘응시 지역’을 확인하지 않았다. 자동으로 대전으로 입력되었다. 서울 시험장에서는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용산역으로 갔다. 혹시라도 대전까지 갈 수 있는 열차가 있을지 몰랐다. 전광판에는 시험 시간 안에 도착할 기차는 없었다. 생활지도사가 옆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제가 확인했어야 했어요. 죄송해요.”
김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합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여기서 그냥 떠나고 싶었다. 가장 빨리 떠나는 기차는 전주행 기차였다. 둘은 말없이 올라탔다. 창밖으로 서울이 멀어졌다. 그날 그의 시험은 멈추었지만 인생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전주에 도착해서는 기분을 풀었다. 맛있는 것도 먹고, 거리를 걸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접었다. 하지만 자신을 접지는 않았다.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부하는 시간이 좋았어요.”
시력을 잃은 후, 그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송에서 시각장애인의 사법고시 합격 소식이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나는 정신 줄 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죠."
사법고시는 멀게 느껴졌지만 공무원 시험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지관에서 인터넷으로 유명강사 강의를 들었다. 5개월쯤 지났을 무렵, 지방공무원 시험이 있었다. 원서를 넣었는데, 대전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시각장애인 응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PC에 ‘센스리더’를 깔아주면 된다고 했더니, 예산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프로그램을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올해는 어렵다고 했다.
다른 데를 알아보았다. 며칠 뒤에 서울 지방직 시험이 있었다. 첫 시험을 말 그대로 '시험 삼아' 치렀고, 떨어졌다. 다음 해에는 더 단단히 준비했다. 사십 대 후반이었지만, 아침 5시 반에 시작해 밤 11시까지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만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응시했던 것이다.
볼링을 시작했다. 비장애인 시절에 좋아하던 운동이었다. 가드레일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공을 굴렸다. 핀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탁.
정적이 흐르고
우르르...
핀들이 쓰러졌다.
첫 경기에서 1등 했다. 볼링코치가 그에게 다가와 대뜸 물었다.
"발레 하셨어요?"
코치는 그의 몸에서 '발레 포즈'가 보인다며, 폼을 조금만 교정하면 선수로 뛰어도 좋겠다며 권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고 볼링선수로 등록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2013년 대구 전국장애인체전 출전을 시작으로 3년 동안 여러 대회에 참여했다. 은메달, 동메달은 걸었지만 금메달은 따지 못한 채 떠났다. 코치는 '폼은 금메달감'이라며 볼멘소리를 내며 아쉬워했다. 그나마 발레 할 때 익힌 동작감각은 되살아 났다. 김현영은 웃으며 말했다.
“누구나 뭐든 할 수 있으면 해 보는 게 맞아요.”
2018년 여름, 그는 시각장애인 열 명과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삼박사일 동안, 하루 15킬로씩 저시력인과 전맹을 짝지어 걷게 했다. 넘어질 듯하면 붙잡아 주고 서로 의지하며 함께 갔다. 숙소에 돌아오면 그날 느끼고 배운 것들을 나누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늘 남의 도움만 받으며 살았어요, 오늘은 제가 남을 도왔습니다."
세 차례 다녀온 후, 코로나를 맞았다. 중단하고 나서는 다시 시작하지 못했다.
“회원들이 너무 좋아했던 거라 못내 아쉬웠어요. 사실, 저는 스페인 산티아고도 다녀오려고 했었어요.”
누군가가 후원만 해준다면, 지금이라도 '시각장애인 올레길 걷기'를 다시 하고 싶어 한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그동안 동료상담받으며 상담에 마음이 끌렸다.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려고 알아보니 학부에서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평생교육원에서 상담심리학과정을 이수하여 심리학 학사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대학원에는 학부와 달리 장애학생 지원 규정이 없었다. 대학원에 요구했다.
"뽑았으면 지원해 주어야 하지 않나요?"
3학기 지나서야 학습 도우미가 배정되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애인은 수혜자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예요. 원하는 걸 분명하게 말해야 해요.”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상담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석사로는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들었어요. 좀 더 알고 싶었죠.”
하지만, 다시 거부당했다. 시각장애인이란 이유만으로.
“심리상담은 임상이 중요하고, 임상에는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시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고려대학교 특수교육과 박사과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석사과정에서 들은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삼으실 건가요?"
일주일에 세 번씩 대전에서 서울로 오가며 수업을 듣는 동안 통학에 어려움을 겪었다. 보행법을 배웠지만 흰 지팡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검정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흰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은 날이었다. 공익요원이 모르고 지나쳐 안내를 못 받았다. 다른 날은 공익요원이 연락하는 것을 깜빡하여 애를 먹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17년 입학한 박사과정을 2023년에 마쳤다.
박사학위 취득으로 마침표를 찍었냐고 묻자 그는 웃었다.
“공부는 끝이 없어요. 여건이 허락된다면 마음공부를 하고 싶어요.”
김현영에게 발레는 인생의 전부였지만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생은 접을 수 없었다.
시험장 문 앞에서 멈췄던 사람이 볼링을 했고, 올레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낮에도 깜깜하다고 말하던 사람이 누군가의 길을 밝히고 있다.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겪고 나서 깨달은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