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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월 Nov 27. 2024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절망해야 오는 기회

"다 짝이 있어. 어딘가 있으니까, 언젠가 만나게 될 거야." 외동딸이 혼기를 놓친 뒤로 몇 차례 들은 말이다. 가까운 분들이 위로라고 한 말이지만 동정처럼 들렸다. 지난해에는 "우리 모임에선 다 보냈고, 너만 남았어."라는 말까지 들었다. 친절하게도 남의 인생사에 관심 많은 분이 꽤 있다. 


  나는 20대 중반에 어쩌다가 결혼해서 26살에 딸을 낳았다. 일찍 결혼하고 보니 누구나 쉽게 맺어지는 줄 알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빨리 결혼하니까, 내가 MBC에서 정년 하기 전에 딸이 결혼할 거고, 일흔 즈음에는 증손을 볼 수 있을 거야 ‘라는 허튼 꿈도 꾸었다. 하지만 내 나이 일흔을 넘기고도 출가시키지 못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내 딸이 마흔 고개를 넘어서부터 아내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시집가면 뭘 해. 시댁 문제, 자식 문제로 속 썩고 살잖아요. 혼자 사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아요." 딸은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바쁘게 산다. 취미로 고전무용도 하며 제 나름 재미있게 살려고 애쓴다. 


 딸 나이가 43에 들어선 올해, 나도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혼자 사는 것도 괜찮아. 그게 덜 고생하고 행복할 거야, 지구 환경도 악화하는데,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게 부질없잖아." 암만 그리 생각해도, 여전히 씁쓸했다. 짝지어 다니는 남녀를 볼 때마다 고개를 돌리곤 했다. 함께 일했던 방송 진행자가 술김에 자조적으로 한 말이 곱 씹혔다. "내가 젊었을 때 잘 못 살아서, 우리 아들 둘이, 둘 다 결혼 못 한 건가 봐."

명동대성당 혼배미사

  지난 팔월에 팔짝 뛸 일이 생겼다, 딸이 결혼하겠다며 사윗감을 데려왔다. 한 살 위인 총각이었다. 게다가 성격 좋고 듬직한 사내였다.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양가에서 흔쾌히 받아들여서, 지난 10월 4일, 명동대성당에서 혼인 미사를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자, 아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위가 '장모님'하고 부를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몰라."


  “마음을 비워야 일이 풀린다.”라는 말이 있다. "골프 할 때, 힘을 빼야 공이 잘 맞는다."라고도 말한다. 억지로 힘을 주거나,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겠다. 나는 절망해야 기회가 온다고 생각한다. 절망해서 포기해야 마음이 비워지기도 하지만, 절망하고 접은 뒤에 기회가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기다림에 지쳐 다른 사람을 만난 뒤에 옛사랑이 찾아오거나, 기껏 개발해 놓고 팔리지 않아 남에게 헐값으로 넘겼는데, 대박 나기도 한다.  


   지금 강의 나가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다. 언론에 자살 사건 보도가 크게 날 때마다 하는 말이다. "기회는 잔인하게 찾아옵니다. 기회는 기다릴 때 오는 게 아니라, 절망하고 포기한 뒤에, 더 이상 기회가 필요 없을 때 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가 누구에게나 반드시 닥칩니다. 그때 제가 지금 한 말을 떠올려 주세요. 조금만 더 기다리며 견뎌내세요. 기회는 잔인하게도 절망한 뒤에야 오니까요."


   몇 해 전에, 가까이 지내던 어느 지인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던 중이었다. 지인의 아들이 회사 회계 문제로 고발당했다.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경찰과 검찰의 조사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올곧게 살아오면서도 자신의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분이다. 평생 주위 사람의 존경을 받던 분이어서까. 견디기가 더 힘들어 보였다. 지인이 세상을 뜬 지 몇 달 뒤에 아들은 기소유예로 굴레에서 벗어났다. 주위에서 안타까워들 했다. "몇 달만 참으시지"


  라디오 PD 할 때다. 나름 색다르게 공들여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애썼다. 국제상 출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은근히 기대했지만, 다른 PD가 거론되곤 했다. 한 번은 특집으로 만든 어떤 프로그램을 소속부장이던 황기찬 부장이  어느 국제상에 출품해 보라고 권했다.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주어지는구나.” 가슴 설레었지만, 그것도 잠시. 국제협력 담당하는 분이 찾아왔다. 다른 부서 PD가 출품하기로 했으니 양보하라고 통보했다. 내게는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1991년, ABU(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상 출품 공모 공지문이 라디오국 벽에 걸렸지만, 정면으로 보질 못했다. 며칠 후, 다른 부서의 어느 PD가 출품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역시 안 된다며 단념했다. 깨끗이 잊고 있었는데, 당시 민용기 제작이사가 라디오 출품작 소재에 문제를 제기했다. 수상 여부를 떠나, 한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대안으로 내가 1991년 국제피처회의(International Feature Conference)에서 발표한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지목했다. 남북분단의 비극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 프로그램은,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한 그해, ABU상 라디오 정보부문 프로그램 대상을 받았다. 야구로 치자면, 9회 말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친 셈이다. 한번 기회를 맞으니, 기회가 이어졌다. 그 뒤로 ABU 대상 3회, 특별상 2회 받았다.

ABU대상 상패, 가운데는 전통음악부문 호소분까상 상패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 인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때가 기회였는지도 끝까지 살아봐도 알까 말 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인간은 숙명적으로 기다림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 Steve Jobs 가 2006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의 생모가 입양 조건으로 대학 졸업을 내걸어, 잡스는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양부모가 가난해서 대학을 자퇴했고, 그 대학에서 서체 수업을 청강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서체를 배웠다. 덕분에 매킨토시를 만들면서, 미려한 서체를 개발할 수 있었다. 과거의 노력이 현재의 성취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이 점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다. 

 청첩 하면서 알게 되었다. 혼기를 놓친 자식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우 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다들 잘 키운 아들딸이고, 훌륭하신 부모일 거다. 어쩌다 보니 그리된 것뿐이다.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세상이다. 나이 든 세대에서는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 힘든 풍조다. 오늘의 결혼이 미래에는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딸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결혼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바랬지만 이루지 못해 혼자 사는 분의 어려움도 헤아리게 되었다. 혼기를 놓친 분들의 기다림이 제때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길 빈다. 

* 이 글은 MBC 퇴직 사우들의 모임인 MBC 사우회에서 발간하는 MBC사우회보 2024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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