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힘이 있다
소중한 것은 드러내야 빛을 낼까요?
가슴속에 묻어둘 때 더 깊어질까요?
명함을 찍은 지 다섯 달 만에 그 일을 내려놓게 됐다. 지난해 말, 사우회보 편집장을 맡았다. 처음 만나는 분께 구질구질하게 소개하기 번거로웠다. 사우회 보는 타블로이드판 8면짜리 격월간 소식지, 독자는 퇴직 사우들이다. 회사 로고가 들어간 명함이니 제법 그럴듯했다. 손끝에 닿는 매끈한 종이 질감에 괜히 마음이 부풀었다.
돌아보면 나는 어떤 일이든 맡으면 오래 하는 편이다. 라디오 PD 시절에도 프로그램을 맡으면 몇 년이고 했다. 전임 편집장은 무려 10년을 했는데, 나는 ‘최단명’ 편집장이 되었다. 그분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명함이 필요 있어? 난 명함 없이도 10년 했어.”
방송사 은퇴 무렵부터 인하대학교에서 <라디오·오디오제작>을 가르쳤다. 시간강사로 시작해 초빙교수, 겸임교수가 되었지만, 끝내 명함은 만들지 않았다. 그럴듯하게 나를 드러내면 뒤끝이 좋지 않을까 해서다. 그래서였을까. 무려 12년이나 강의를 이어갔다. 그 오랜 세월 강의한 건, 명함도 찍지 않고 티 내지 않고 지낸 덕 아닐까.
“드러내면 드러내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오래된 징크스다. 물론 미신이지만, 누군가 시샘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봤다. 그리 된 것은 포의 시 때문이기도 하다.
"천국에서 우리 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나의 사랑을 시샘하였습니다. "
에드거 앨런 포가 사랑하는 아내 버지니아를 잃고 쓴 시 '에너벨 리' 한 구절이다. 시인은 자신들이 너무 뜨겁게 사랑하자, 하늘의 천사가 질투해 아내를 데려갔다고 탄식한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한 시인의 '시적 표현'을 무슨 대단한 ‘가르침’처럼 받들었다.
나는 아직도 소중한 꿈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시, '시론'에서 내 마음을 노래해 주었다.
"바닷속에서 전복 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
물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
제주 해녀처럼, 나도 좋은 건 가슴에 묻어두었어야 했다. 사보 편집장을 맡고 나서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일을 맡으면 몰입하고, 일중독자처럼 굴던 그 버릇 그대로다. 신문 편집의 기초부터 혼자 익혀가며, 국내, 외 자료를 뒤졌다. 신문 지면을 타블로이드 판 크기로 잘라가며 편집 감각을 익혔다. 라디오 제작기법을 살린 색다른 글쓰기도 시도했다. 만나는 이 마다 사보편집장이 무슨 큰일 하는 듯 자랑질까지 해댔다. 나가도 너무 나갔다.
명함도 그래서 서둘러 찍었고, 여느 사보에서는 꿈꾸지도 않을 지방 취재 출장길에 올랐다. 드러내도 너무 드러내다 사고 쳤으니, 결국 내 징크스에 걸린 셈이다. 포의 시를 흉내 내자면, 내가 너무 즐겁게 일하니, 일하기 심드렁하는 하늘의 어느 천사가 속이 뒤틀렸다. 편집장 일을 뺐으려고, 지방 출장길에 오른 나를 야산으로 끌고 가 쓰러뜨렸다. 물론 농담이다. 나는 모든 일에는 주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이번 일에 감추어진 뜻을 묵상 중이다.
씨앗은 흙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올라온다.
꽃은 소리 없이 피어나고, 열매는 아무도 모르게 익어간다.
내 소중한 꿈은 가슴에 묻어두었다. 드러내 보이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 꿈은 가슴 깊은 곳에서 묵묵히 자라나 때가 되면 스스로 빛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