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비춰준 거울
내 아픔이 있어야만, 그대의 아픔이 보이는 걸까.
"나도 그렇게 아프잖아. 조금 전 들은 말이 기억나지 않기도 해."
내가 내 아픈 증상을 설명하니까 친구가 그렇게 말한다. 친구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지 1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친구의 말을 흘려들었나 보다. 내가 아프고 나서야 친구의 증상이 가슴에 와닿는다. 친구와 나는 '인지 장애'를 겪고 있다. 친구는 질환으로, 나는 사고 때문이다.
나는 취재하다가 야산에서 쓰러졌다. MRI 촬영 결과, 뇌에서 인지를 담당하는 부분이 손상되었다. 인지능력 테스트를 받으니 기억력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인지테스트받으며 느낀 수모감을 털어놓았다. 그도 비슷한 느낌을 겪었다며 웃으면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몇 달 전에도 내게 한 말이다. 그동안 그의 고통을 흘려들었던 것이다.
남의 아픔을 온전히 알기란 쉽지 않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도 금쪽같은 제 새끼의 아픔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저시력인협회 미영순 회장은 단정적으로 말한다.
"장애인 자녀의 마음을 부모조차 알 수 없습니다."
여고생 시절부터 시력 장애를 겪으며 살아온 그다. 숱한 시각 장애인들과 50년 이상 함께하며 얻은 경험으로 그렇게 말했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애써 공감하려 해도, 같은 자리에 서 보지 않으면 끝내 닿지 못하는 벽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벽을 알게 되었다. 아픔이라는 문이 열릴 때 비로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음을 배웠다.
아픔으로 문을 연 분이 있다.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다가 한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다미앵(Pater Damiaan) 신부다.
150여 년 전만 해도 음성 한센병은 전염되지도, 유전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와이에 살던 한센인들을 몰로카이섬으로 쫓아냈다. 그들의 삶은 비참했다. 집은 나뭇가지로 만든 초라한 집이었고, 먹을 것이 부족해 병으로 죽은 사람보다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다미앵 신부는 다른 신부와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한센인들에게 집을 지어주었고, 관을 만들어 1,600여 환우들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성당을 세웠다.
"우리 한센인들은…"
어느 날, 다미앵 신부가 미사 강론에서 그렇게 말한다. 한센인을 돌본 지 12년 만에, 자신도 한센병이 찾아왔음을 알린 것이다. 한때 한센인들은 건강한 신부가 어찌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겠느냐며 거리감을 두었다. "하느님, 저에게도 나병을 주셔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소서." 신부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단순한 외부인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다. 그 고통 속에서 비로소 마음이 열리고, 사랑은 빛이 되었다.
진정한 공감은 말이 아니라 눈물이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흘린 눈물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준다.
그대가 울 때, 나도 울고. 내가 울 때, 그대도 운다.
그 눈물이 내 눈을 적실 때, 우리는 더 이상 남이 아니다.
내가 아프고서야 그대의 아픔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