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에서
융건릉에 입장하고 몇 걸음 옮기다가 두세 살 즈음의 아이가 하는 말을 듣는다. 바닥을 두리번거리다 주저앉고 곧 일어나면서 하는 인사말.
“도토리야 안녕.”
도토리 등의 임산물을 채취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입구에 붙어 있다. 아이가 도토리와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헤어지는 중인가 보다.
아이는 “도토리야 안녕”이라는 말을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반복한다. 아이의 아빠가 “응 그래 도토리 안녕 하자”라며 추임새를 넣는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나도 걸으면서 도토리를 찾는다.
가을이다. 왕릉을 산책하기 좋은 때다. 가을 뿐인가.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도 좋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답게 조선 시대 왕릉이 많다. 왕릉에서 조상들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이어오고 왕릉을 보전해서 멋진 숲을 후대의 사람이 누리게 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 왕의 무덤에 평민인 내가 드나들며 편평한 산책로와 오래된 나무들을 마음껏 즐기고 있어서다. 왕릉을 조성해준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지금도 왕릉을 유네스코 세계유산답게 잘 보전하느라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오늘 융건릉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많다. 가을 산책 나온 아이가 도토리에 관심을 보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열심히 도토리를 찾는다. 도토리를 매개로 아이와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웃는 소리도 듣기 좋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도 곤충을 따라간다. 왕릉에서 숲이 주는 좋은 기운과 더불어 행복해 보인다.
나무 사이를 걷는데 도토리가 한 주먹씩 모여 있기도 하다. 사람들이 도토리와 행복한 시간 보내고 다람쥐를 위해 모아 두고 갔나 보다.
융릉은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사도세자와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의 능이고 건릉은 계몽 군주이면서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과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와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의황후 홍씨를 공양하고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다는 김씨의 능이다. *
융건릉에 묻힌 분들은 아픈 사연과 안타까움, 사랑이 겹쳐진다. 장조는 3세에 《효경》을 외울 정도로 총명해서 영조의 기대가 컸는데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노론 벽파가 경계하며 임금과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조는 왕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하고 곧 후회하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평범한 가족도 아이를 낳고 돌보다 보면 기대치가 생기거나 못마땅한 부분도 있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기회를 자녀는 얻기를 바라기도 한다. 가족들과 행복한 순간으로 물들기보다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서로 화내며 지내기도 한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는 정치적 영향까지 겹치며 거센 태풍이 휩쓸었다. 그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만들어진 자리에 일반인들이 모인다.
태풍이 지나간 왕릉은 넉넉한 숲으로 고요하게 사람을 품어준다.
도토리를 찾으며 세상 전부를 누리는 듯한 아이들. 도토리를 만지며 놀다가 오줌 마리다는 말을 했다고 칭찬하는 어른들. 아이가 한 발씩 걷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들. 융건릉에서 건강하게 자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부담 없이 그저 지금의 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사람들. 왕릉은 권위를 내려두고 사람들에게 휴식을 준다. 오늘은 도토리가 제대로 한몫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