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범, <살아야지>
가수 임재범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는 삶을 겪어내려 애쓰다 서 있을 힘이 하나도 없을 때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임재범의 노래 <살아야지>를 반복해서 듣는다.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혼자.
혼자.
누군가와 어울리거나 함께 있지 않고 홀로 있는 상태.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감 느끼고 싶은데 삶은 혼자의 시간이 많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날 임재범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혼자’에 오롯이 머문다. ‘어때야 한다’라는 의무감을 내려놓고 화내는 나, 서러워하는 나, 절망하는 나의 눈물과 만난다. <살아야지> 노래가 나의 해소하지 못한 감정을 눈물로 애도하게 한다.
내 인생의 화두는 ‘외로움’이다. 내가 독서를 하거나 공부하는 이유가 외로움을 견디는 도구인지도 모른다.
궁금하다.
때로는 지독하게 쓴 내 나는 외로움을 부여잡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회피하고 싶은 외로움을 끌어안고 다독이며 눈물로 나아갈 힘을 내야 하는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처절하게 외로운 날은 말을 하기가 어렵다. 나에게 공감하고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하소연이 길어져서 누군가의 감정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누군가에게 공감을 너머 감정 쓰레기 치워달라고 나도 모르게 요구할까 봐 겁난다.
공감은 누군가의 감정, 의견, 주장에 대해서 자신도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다. 자신이 누군가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서 그의 끝없는 분노나 슬픔을 다 껴안을 수는 없다. 감정 쓰레기 던지는 사람을 만족시킬 방법은 신만이 아시지 않을까 싶다.
공감은 감정을 마구 쏟아내려는 누군가가 기대하는 호의가 아니라 서로의 몸과 감정의 상태를 이해하고 두 발을 땅에 디디기다.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다 보면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친절한 사람을 감정 쓰레기 치우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필요하다.
외로움이 걷잡을 수 없는 날 나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함부로 하소연하지 않으려고 의도를 세운다.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예의를 지키는 귀한 인연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혼자’라서 서러운 날, ‘혼자’ 임을 버티게 해주는 임재범의 노래 <살아야지>.
<살아야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순간은 언어로 나의 상태를 표현할 수 없는 날이다. 눈물 한 바가지 쏟아내며 정화가 필요한 날이다. 내가 마음껏 울게 해주는 노래, 깊은 골방에서 한참 울면서 ‘살아야지’ 하고 두 발에 힘을 주게 하는 노래다.
임재범의 <살아야지>는 혼자 듣는 노래다. 노랫말의 울림에 머무르며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참 오랫동안 나의 깊은 외로움, 절망감, 슬픔을 함께해 준 노래다. <살아야지> 노래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노래를 만든 사람이나 노래를 부른 가수가 고단한 삶의 순간과 마주할 때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 사실이 그들의 고단한 날을 버티는 힘이 되면 좋겠다.
삶의 그림자를 겪어내느라 7년 동안 음악 활동을 멈췄던 가수 임재범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콘서트를 했다. 내가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살아내게 도와준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콘서트에 참여했다. 노래해 줘서 감사하다는 메시지와 책 한 권을 전하고 싶었으나 콘서트에서는 가수에게 선물을 전달할 수 없었다.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 임재범을 향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반복하며 손바닥이 아플 만큼 손뼉을 쳤다.
혼자 듣던 노래 <살아야지>를 콘서트장에서 육성으로 들으니 또 눈물이 났다. 나에게 ‘혼자’의 시간을 감당하게 해 줘서 고맙고 가수가 힘든 시간을 겪어내고 무대에서 다시 노래 부르는 모습에 감동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