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확신
불확실하고 모순되는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 경험 속에서 확신을 만든다.
나는 모르면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모은다는 것은 ‘열심히’를 바탕으로 한다. 머리로는 ‘열심히’가 아니라 ‘마음을 모으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 노력이 기대를 채워주지 않을 때 실망이 속에서 올라오고, 좋고 나쁨의 잣대를 들이밀어 부대끼게 되고, 확신은 초점을 잃고 갈팡질팡한다.
50대에 접어들어 사이버대학에 편입했다.
첫 학기 6과목 수강하고 장학금을 탔다. 두 번째 학기 8과목을 수강하고 장학금을 탔다. 모르는 것이 많아서 마음을 모아 최선을 다했다. 두 학기를 지내며 몸에 무리가 되어 심하게 앓았다. 세 번째 학기에는 5과목을 수강하는데 자꾸 열심히 하는 내 일상이다.
삶은 친절한 보상을 그리워하는 ‘허기’를 가지고 있다.
몸이 힘들어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적 확신에 빠져 사는 이유가 내가 열심히 했을 때 주어진 장학금이라는 보상이 좋았던 모양이다. 장학금이라는 형태의 보상을 원했다기보다 인정 욕구에 핑크빛이 더해져 만족감에 빠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세 번째 학기의 성적이 공개되었다.
세 번째 학기에 가장 정성을 기울인 과목의 점수가 제일 나쁘다. 한 달 넘게 밤잠 설치며 과제를 해내고 사이버 대학 특성상 학교 게시판 활동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7개의 토론 주제에 16개의 글을 썼다. 시험공부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어려운 시험문제를 그럭저럭 풀었다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다.
불확실함을 이해하려 마음을 모으면 된다고 확신하고 정성을 기울였으나 결과가 좋지 않다.
자신이 합리적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확신을 보면 비합리적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치부하며 산다고 한다. 그래서 확신은 가설이라고 한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험 결과가 왜 실망스러울까?
내 의식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무의식은 정성을 기울여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는 가설을 확고하게 세우고 있었나 보다. 세 번째 학기에 시간 할애를 가장 많이 하고 마음을 모았다는 생각, 정성을 기울였다는 확신, 이 정도의 정성에는 성적 수준이 좋아야 한다는 가설마저 확고했던 모양이다.
정성을 기울였다는 확신이 결과에 대해 실망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
과정에 마음을 모았으면 그뿐 결과는 내가 통제할 영역이 아님에도 “마음을 모아 열심히 했다.”라는 확신으로 갈팡질팡한다.
마음을 모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확신이 흔들린다.
내가 가진 ‘확신’은 ‘가설’이지 ‘사실’이 아니다.
마음을 모아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 할 일을 하는 줄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예측보다 좋은 일을 만나면 만족하고, 나쁜 일을 만나면 불만족스럽다.
내가 옳다고, 내가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대어 세상의 웬만한 불확실함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지만 나는 지금 예상보다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있을 뿐이다.
토끼풀이라고도 부르는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이라는 것을 알아도 굳이 네 잎을 찾아내야 행운이 찾아올 거라고 여기듯이 정성을 기울이면 좋은 결과가 있어야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것도 ‘확신’이라는 이름의 가설이다.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확신 뒤에 ‘인정 욕구’가 꿈틀거린다.
마음을 모으는 행위에 욕심이 들어갔다. ‘행운’을 뜻하는 클로버는 세 잎도 예쁘고, 네 잎도 예쁘다. 내가 열심히 했다고 꽉 쥐었던 손을 편다.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