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기회가 생겨 오랜만에 합숙 교육을 하게 되었다.
1주 이상 합숙은 군대를 제외하고는 17년만인 것 같다.
오랜만에 짐을 싼다.
캐리어에 짐을 싸기 전에 커다란 지퍼백을 여러 장 구해왔다.
여기는 티셔츠, 여기는 바지, 여기는 속옷 양말, 여기는 세면도구 등등..
나름 챙겨서 캐리어가 가득 찼는데도 왜인지 먼가 불안하다.
이제 없으면 안될 것 같은 물건들은 다 짐을 싼 것 같다.
이제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물건들을 챙겨보자.
보조배터리..에어팟..
블루투스 스피커도 챙겨가면 좋으려나..쉬는 시간에 분위기나 좀 살려볼까?..무겁진 않을까?
"아 맞다! 스마트폰 충전기!"
필수적인 것들은 모두 태블릿에 적은 후 슥슥 지워가면서 꼼꼼하게 챙긴다고 챙겼는데
오랜만에 떠나는 집이라 그런지 뭔가 계속 허전하고 불안하고 긴장이 되는건
40대중반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다.
월요일 아침이라 차가 막힐 것 같아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핸들을 잡고 전방을 주시를 하며 나름 긴장해서 운전을 해도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갑자기 첫 회사 연수를 떠나던 27살의 내가 떠오른다.
27살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저 차는 1차선에서 왜 정속 주행을 하는거지? 참 갑갑하네.
아 저 트레일러는 너무 무서워 다른 차선으로 가야겠다.
포항공대의 학식은 맛있을려나?
아직도 50킬로나 남았네.
아 배가 좀 고프네. 일찍 도착해서 커피라도 한잔해야겠다.
방학이라 교내 카페 운영은 할까?
목적지와의 거리와 가까워질수록 내 현생과 가까운 것들만 또 떠오르게 된다.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했다.
학교에 있는 호텔이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으리으리한 경관에
먼 거리를 달려온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어 만족스럽다.
주차를 하고 커피를 한잔 사러 간다. 학생회관이라 적힌 건물로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보는 브랜드의 카페가 눈에 들어 오고 거기서는 누가 봐도 용돈벌이를 하러 온
학생들로 보이는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손님은 나 밖에 없고 직원은 4명이나 있었지만
키오스크로 향하는 나에게 아무도 말을 걸을 걸어주지 않는다.
키오스크를 다루는데 미숙하면 왠지 아재라 무시 받을 것 같아 나름 민첩하고 엣지있게
메뉴아이콘들을 누르며 화면을 슬라이드 했다. 커피 이름이 다 생소하다.
메뉴에 대해서 물어보면 또 아재라 무시할거 같아 차마 물어보지 못 했다.
미묘한 적막 속에서 나는 산미가 있을 것 같은 이름의 커피의 아이콘을 누르고 카드결제를 했다.
결제를 하고 카페 여기저기를 둘러 보았다.
1분도 되지 않아 ’주문하신 커피 나왔어요.‘란 말과 함께 커피가 나왔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하며 주문대의 커피를 잡았다.
어느 직원도 내 인사에 화답해주지 않고 한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나머지 한손은 차마 호주머니에 넣지 못했는지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서는 스마트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MZ들이란....'
난 사람이 아니라 키오스크에 주문을 했으니 난 키오스크에게 인사했다 생각하고 쿨하게 돌아섯다.
자, 드디어 포항에서의 첫 커피다. 기대반 의심반으로 한모금 천천이 마셨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커피 맛이 났다.
‘에이~내 취향은 아니네..’
내 취향이랑 먼 끝맛에 소나무 향이 나는 커피를 손에 쥐고 학교 여기 저기를 둘러본다.
1% 상위권 애들이 다니는 학교라 그래서인지 동아리 홍보 포스터에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숨어 있을까봐 유심히 바라봤다. 전화기에 짧은 메세지 진동이 느껴진다.
회사에서 단체관광버스를 타고 출발한 팀들이 이제 도착할 모양이다.
연수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를 한대 태우러 갔다.
묘하게 군대 입소 5분전에 훈련소 담벼락에서 담배를 태우던 내 모습이 스쳐간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을 가라 앉히고 나는 로비로 향했다.
버스를 타지 않고 자가용을 가져온 같은 부서 동료이자 프로젝트의 조원이 먼저 로비 쇼파에 앉아 있었다.
‘아 심심한데 잘됐네’ 하며 쇼파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잡고 인사를 하자마자 저기 멀리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아저씨가 반바지의 남루한 차림으로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에 나쁜 내 시력을 자체 보정하니 교수님이셨다.
교수님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아~!'하는 탄식 나왔다.
갑작스런 내 탄식을 보고 본인의 궁금증의 정도를 갑자기 커진 눈동자의 크기로 표현하는 옆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과장님, 무슨 일있어요? 저 사람 교수님 아니에요?'
나는 답했다.
'내가 반바지를 입을까 긴바지를 입을까 고민을 엄청하다가 교수님들은 보수적이시니 수업에는 긴바지를 입어야지 했는데....., 정작 교수님이 반바지를 입으셨네...'
눈동자의 크기가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동료가 김빠지듯이 말했다.
'그게 그리 억울할 일이에요?'
미간에 있던 주름이 이마로 옮겨간 나는 답했다
'응 매우 억울해.'
그리그 그 사이 가까이 다가온 교수님께 인사를 드렸다.
버스를 타고 회사에서 출발한 회사동료들이 모두 도착하고 우리는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커피/다과/콜라 등 진수성찬이 보인다.
내 손에 낯선 소나무향 커피를 테이블에 던져놓고 인스턴트 커피캔을 낚아챘다.
한모금 들이킨다.
오늘 하루중 유일하게 낯설지 않은 것이 느껴진다. 마음이 편안해 진다.
편안해진 마음 탓인지 커피를 마셨는데도 오프닝 기념사를 들으니 잠이 쏟아진다.
하필이면 강의탁자랑 가장 가까운 곳이 나의 자리다.
이번에는 미간이 아닌 눈썹에 힘을 준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얼굴에 힘을 많이 준다.
오프닝의 위기를 넘기고 시간이 애매해서 바로 점심식사를 하러갔다.
멀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인스턴트 꼬마돈가스가 제일 맛이 났던것 같다.
식사 후 조원들과 포항공대의 명물! 핫플레이스! '테라로사'라는 카페를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이미 포항커피의 쓴맛! 소나무맛을 이미 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또 눈동자의 크기로 본인의 기대를 표출하는 조원들 덕에 방문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한 여름의 햇살을 태양열전지처럼 온몸으로 받으며 테로로사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오전에 봤던 카페의 겨드랑이손 학생들과는 다르게 프로바리스타같아 보이는 직원들 3명이 카운터에서 주문과 커피제조를 하고 있었다. 메뉴판에는 얼죽아인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이름의 커피들만 나열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기억하지도 못 하는 이름의 커피를 시켰다. 그제서야 예쁜 카페의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둘러보다보니 또 커피가 나온다.
소나무 커피의 효과인지 '쭈~욱'이 아니라 소심하게 '쪽!' 빨아서 입에 넣어 본다.
오후부터 본격적인 과제 수업에 들어간다.
다른 조원들보다 많이 준비하지 못 해 나름 연수 전주 주말에 시간을 써 자료를 준비해 보여줬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은거 같아 '0.5인분은 했구나'하는 안도감이 든다.
드디어 포항공대에서의 첫번째 멘토링 시간이다. 교수님과 부사장님 면접관처럼 앉아계셨다.
실제로 멘토링 옆방에서 에코프로라는 회사의 면접이 진행되고 있어서인지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조는 준비를 많이 했다는 평가가 있어서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조별멘토링의 배정 시간은 각 조별로 30분이었다.
우린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2배인 60분의 멘토링이 진행됐다.
조원들중 가장 연장자인 나는 애써 쿨해보이려 '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길게 하는거야'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모두들 팔짱을 끼고 턱을 문지를 뿐이었다.
뭐 제대로 한거도 없는거 같은데 또 다시 식사시간이다.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 아닌가. 석식은 학생식당을 이용한다고 했는데 모두들 오랜만의 대학 학식이라 그런지 낭만에 빠졌는지 표정들이 밝다. 첫날이라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초등학생처럼 로비앞에 모두 모여 인원체크를 한 후 식당으로 향했다. 푹푹찌는 여름 날씨에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무리의 뒤를 쫒다보니 갑자기 담임선생님 인솔을 따라 소풍을 가는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내 머리를 스친다.
'오리 꽥꽥~ 오리 꽥꽥~'
내 아들이 중학생인데 나도 참 주책이다.
드디어 낭만의 학생식당에 도착했다.
포항공대에 도착해서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들을 거의 보지 못 했는데 여기에 다 모였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식당은 북쩍북쩍했다. 학식 첫 메뉴는 모밀국수+돈가스 였다. 그렇다. 돈가스는 학식의 근본이자 진리요 소울이다. 지금부터 나는 ‘뭘좀 아는’ 우리의 인솔담당 과장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했다. 식권 키오스크에서 사람수만큼의 식권이 줄줄 뽑혀나왔다. 둥지에서 엄마새에게 먹이를 조르는 아기새처럼 나는 식권 한장을 낚아채었다.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난다. 식권번호 406번.
398번 정도로 보이는 다른조 연수 동기생이 식판을 들고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제법 맛있어 보였다. 방학이라 식당 인력운용이 정상적이지 않은지 음식 너무 늦게 나왔다. 398번 식사가 나오고 20여분 후에야 내 차례의 식판이 등장했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나는 가장 먼저 받은 398번보다 식사를 빨리 마쳤다. 약 3분정도 걸렸던 것 같다. 체면도 없이 본능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을 보아하니 나도 이제 이 사람들이 많이 편해졌나보다. 아니면 식탐이 체면을 삼켜버린 것일지도. 성인남성 중에서도 덩치가 매우 큰 편에 속하는 나에게는 배식량 조금 많이 모자르다는 느낌이 있어 저녁에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 조원들과 편의점으로 향했다. 컵라면 2개와 생수를 사서 숙소로 복귀했다.
나는 제비뽑기에 실패해서 1인 1실이 아닌 2인 1실에 배정 받았다. 생각보다 넓었고 거실과 같은 공용 공간이 넓어서 침실의 침대를 거실로 하나 옮겨 각방을 쓰기로 했다. 룸메이트가 맘에 안 든 것은 아니었고 30대 중반부터 생긴 비염때문에 코를 크게 골아서 내가 먼저 마루에서 지내겠다고 제안했다. 편의점에서 조원들과 헤어지면서 저녁에 추가적으로 할게 있으면 만나요라고 했는데 약속이나 한듯이 서로 아무 연락이 없어 첫날은 푹 쉴 수 있었다. 룸메이트도 피곤했는지 저녁 9시 밖에 안 되었는데 잠을 청했다. 나는 SNS와 유튜브를 오가다 잠을 청하기 전 양치를 했다.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던중 낮에 먹었던 학생회관 커피에서 나던 소나무 향기와 똑같은 향기를 느겼다. 그제서야 포항의 물에서는 특이하게 소나무향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덧 연수 3일차다.
갑작스럽게 생긴 9호 태풍 '종다리'의 덕에 새벽에 비가 와서인지 오늘은 습도가 아주 매우 너무 높다.
3일차 정도되니 조금씩 마음이 급해진다. 열심히 받아적은 멘토링 코멘트를 과제 녹여도 녹여도 새로운 코멘트가 계속 나온다. 초반에 멘토님들과 우리의 관계는 사제지간과 같이 우리의 성장이나 학습에 중점을 두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준 반면 3차 멘토링부터는 사장님께 발표드릴 과제를 준비시켜야 하는 본부장님의 고뇌같은 것이 느껴진다.
3차 멘토링 후에 코멘트를 한바닥 적어온 우리조는 드디어 올 것이 오게 되었다. 해피해피한 내 연수 수기에도 드디어 '갈등'의 국면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 온 사이에 묘하게 우리조 회의테이블의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능력치도 다르다. 한쪽이 사족을 싹 발라낸 순살치킨을 넘어 기름기까지 쫙 빼낸 닭가슴살을 선호하는 타입이라면 다른 한쪽은 요리와 데코가 잘 어울려진 프랑스 요리를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갈등은 어쩌면 당연하다. 27살에 2달여간 진행되었던 신입사원 연수 조별과제에서도, 직장내 합숙교육에서도 이런 갈등은 자주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야만 의미있는 연수가 될 수 있다. 발표의 성적보다는 인간관계가 먼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관계를 위해 서로의 의견을 서로 참아봤자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 할 시에는 그것은 감정을 모았다가 한번에 터트리는 계기 밖에 되지 않는다.
최종 발표 후 '그러길래 내가 하자는대로 했어야지!' 라고 서로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만 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할 시간도 없이 3일차 과업시간이 종료되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