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제 할 도리는 해야지!"
내가 불평을 늘어놓을 때면 엄마는 늘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웬만한 집안일은 척척 해냈다. 손등에 물을 맞춰 밥을 짓는 일부터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널고, 걸레를 빨아 방을 훔칠 줄도 알았다. 토요일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남동생 실내화까지 솔로 벅벅 문대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널어 말리는 것도 나의 중요한 일과였던 것 같다. 아무래도 엄마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맏딸이었던 나는 힘든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던 탓인지 딱히 거부하지 않고 주어진 일들을 꽤 완성도 있게 해냈다. 명절이면 제사를 지내지도 않는데 식구들 먹을거리 정도는 해야 한다는 엄마의 지론에 따라 장을 보고 전을 부치는 일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모든 집안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사람은 엄마와 나였다.
엄마를 객관적으로 보자면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큰 이모는 어차피 남의 집 식구 될 딸을 굳이 가르칠 필요 있느냐며 언니를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제사 지내 줄 아들인 오빠는 대학에 갔다. 정말이지 개화기 이전의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굉장히 불합리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교육에 관해서는 딸과 아들의 차등을 두지 않았고 공부에 욕심을 내는 자식에게 뒷바라지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집안일에 있어서 만큼은 여자의 역할에 아주 큰 비중을 두었다. 말의 시작마다 '여자가~ 남자가~'를 붙이면서 남녀의 역할에 대한 본인의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같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셈인데 누구는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고, 누구는 그 밥상을 차려내는데 장 보는 일부터 재료 손질, 요리하기까지 몇 시간씩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이 불평등한 구조는 왜 지금 이 시대가 되어서도 우리 집에 여전히 남아있는 건지 가끔 엄마한테 울화가 끓어올랐다. 정확히는 엄마의 가치관을 나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남의 집 사정은 모르겠고 밥통에 밥이 없거나, 빨래통에 빨래가 쌓여있거나, 집안이 어수선하면 엄마는 여자이자 딸인 나에게 늘 잘못을 추궁했다.
"엄마가 바빠서 집이 엉망이면 네가 좀 치우고 때가 되면 밥통에 밥이 있나 좀 열어 보고 할 일이지, 여자가 돼 가지고 이렇게 지저분해서 어디다 쓰겠어?"
"나도 바빠. 요즘은 남자들도 다 요리하고 청소도 하면서 살아! 엄마는 왜 나한테만 하라고 해?"
"계집애가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남자애가 뭐 할 줄 알아서 해. 아무래도 여자 손이 더 야무지지."
"됐어! 집안일 못해도 다 잘 살아. 나는 나중에 일하는 아줌마 쓰면서 살 거야."
집안일을 할 줄 알아야 나중에 결혼해서 덜 힘들다는 논리로 세뇌당해 온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러면 엄마는 늘 가자미 눈으로 나를 째려보면서 욕을 하는 건지 중얼거리는 건지 모를 말로 입을 삐죽거렸다.
일 년에 한 번씩 김장 김치를 담글라치면 나는 주말 약속을 절대 잡으면 안 됐다. 몸살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토요일과 일요일 장장 이틀에 걸친 김장 노동이 끝나면 아침 일찍 외출했다 들어온 남동생이 먹음직스럽게 버무려진 김치를 보면서 수육 타령을 하고, 매년 반복되는 상황이므로 엄마는 이미 가스레인지 위에서 삶아진 고깃덩이를 큼지막하게 썰어내 갓 담은 김치와 함께 상을 차려냈다. 김장 양념에 옷이 더러워진 나는, 김치가 만들어지는데 손톱 만큼의 지분도 없이 수육을 목구멍에 쑤셔 넣는 남동생을 보면서 고춧가루 양념이 가득 묻은 배추로 동생의 귀싸대기를 시원하게 올려붙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엄마는 전라남도 고흥 끝자락에 있는 남 씨 집성촌의 가난한 집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60년대의 시골 사정이 대부분 그러했듯 아들자식은 고등학교까지 보내도 딸자식들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시키거나 그마저도 못 다닌 경우도 많았다. 어린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손위, 아래 형제들과 일손 바쁜 농사일을 도와야 했고 끼니때가 되면 군불을 때서 밥을 짓거나 엄마의 엄마를 도와 많은 집안일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때의 이야기를 가끔 곱씹으면서 그래도 그렇게 살림을 했었던 것이 손에 익숙해 결혼해서 좀 수월했다고 했다.
"결혼해서 시댁에 들어갔는데, 한 끼에 열세 명 밥을 하고 반찬을 했어. 그걸 하루에 세 번 반복하는 거야.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점심 먹고 돌아서면 저녁. 근데 그걸 하면서 엄마가 느낀 게 뭐냐면, 그래도 외할머니가 살림을 가르쳐 줘서 할 줄 아는 게 있으니 그나마 수월하구나 싶더라니까. 너희 큰 엄마는 아궁이에 불도 못 붙이고 손도 느려서 반찬 하나 만드는 것도 한참 걸려. 아휴... 그래서 너도 나중에 편했으면 싶어서 엄마가 더 시키는 것도 있어."
이도 저도 생각이 없던 어릴 때는 '아, 그렇구나.' 했는데 요즘은 이런 반발심이 든다.
'아니, 할 줄 모르면 더 편한 거 아니야? 할 줄 아는 게 많으니까 일이 더 많지!'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남성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평등과 권리 어쩌고 저쩌고 하자는 게 아니라 어느 한쪽의 노동이나 희생으로 이뤄진 결과물을 다른 한쪽이 아무런 대가 없이 취하는 구조가 불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에피소드 중에서 수육을 먹는 남동생에게 ‘김치 싸대기‘를 날리는 장면을 상상했던 것은 나에게 이런 가치관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도 남자도 혹은 성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도 모두 인간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원론적으로 이 말이 우선됐으면 좋겠다.
엄마는 오늘도 외출하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들으라는 듯 타박했다.
"여자가 좀 품위가 있어야지. 빤스고 젖가슴이고 다 보이게 입게 다닐 거면 아예 다 벗고 다녀. 요새 여자애들 옷 입는 거 보면 꼴 보기 싫더니만 우리 집에도 하나 있네!"
엄마가 말하는 '여자의 품위'는 도대체 뭘까? 문맥적 의미를 짐작해 보자면 '여자다움'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여자다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엄마의 시대와 나의 시대는 다르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신념도 조금씩 변한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이 주를 이루다가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세인 시대다. 나는 엄마처럼 한 끼에 열세 명의 밥을 지을 일이 지금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쌀을 씻어 안치고 전기밥솥의 버튼만 눌러 놓으면 먹음직스러운 밥이 된다. 굳이 밥을 잘할 필요가 없다. 청소도 로봇청소기가 내가 청소에 들이는 시간을 절약해 준다. 고로 나는 청소를 잘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만 늘 말했던, '힘들어도 제 할 도리는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속에 '제 할 도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도리'라기보다는 대를 이어 온 여자와 딸의 역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엄마의 '과도한 책임감'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나에게도 지울뻔한 그 역할 책임을 나는 거부하고, 여자와 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괜히 비장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