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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시

- 베른하르트,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by 김네잎


나는 한 막사를 응시한 뒤 눈을 감고서 막사들을 줄을 지어 배치했다. 나는 한 막사의 치수를 측정한 다음, 안내 책자를 근거로 막사 안의 빽빽한 주거 밀도를 계산하고서 그 비좁은 형상을 상상해보았다. 나는 막사들 사이의 계단이 동시에 점호대로 사용되었음을 알아내고 수용소를 아래쪽에서 위쪽 끝까지 올려다보면서 줄을 지어 뒤로 돌아서 있는 수감자들의 등들로 그 계단을 채워보았다. 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비참하고 부끄러운 느낌뿐이었다.


- 베른하르트,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래, 2004, p166~167.





배터리 케이지*




이곳은

A4 용지 2/3 크기죠


야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안락을 온전히 품을 수도 없이


오늘을 살아요


여기는 잠속이 좁고 어두워

어항 속 물고기가 되는 꿈을 꾸죠

슬픈 날개와 지느러미

다시 갇히는 세계와 멀어지는 방향


죽음을 탐색해도 될까요

동족의 날개 밑 온기를 쪼아도 될까요


의심 없이

반성 없이


본능은

가끔 깨집니다


모성이 우글댑니다


달이 차지 않아도 무럭무럭 태어나는

무정한 것들은

어디로 굴러가서 바깥이 되나요?


아무도 모르게

내가 독백을 숨겨놓았는데


* 달걀 생산 방식 중 하나로 좁은 공간 안에 닭 6~8 마리를 집어넣는 구조물


- 김네잎, <<작가들>>, 202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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