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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7. 2023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13

*



   찬바람 속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나를 깨운 건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는 무너진 교권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식이 떠올라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무서운 세상이다. 그래도 참고 살아야 하는 거야. 다들 견디면서 사는 거야. 근데 딸, 밥은 먹었고?”


   “엄마, 내가 갑이야.”


   “사람 사는데 갑이 어디 있고 을이 어디 있냐?”


   “나 실력 있다고 소문나서 오겠다는 애들은 많아. 일정이 빡빡해서 내가 학생을 골라. 그럼 내가 갑이지.”


   “그래서 좋아?”


   “응?”


   “딸은 딸이 갑이어서 좋으냐고.”


   “응, 아니. 응, 아니. 나도 모르겠다.”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삼켰다. 거리는 너무 차갑고, 엄마는 늦었어도 밥은 꼭 챙겨먹으라고 했고, 나는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네이버 길 찾기에서 검색해보니 라멘 식당은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그때 ⟨당신의 단어⟩는 너의 단어는 찾았냐는 물음으로 끝났다.

   텐진이 아닌 시오의 목소리였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네가 감튀!를 얻었던 터키는 튀르키예로 국가 명칭을 변경했고, 나는 종종 네가 심연을 만났던 화산들, 카와 브로모와 카와 이젠을 검색한다. 미세먼지와 바이러스로 마스크가 일상이 된 세상이 됐고, 나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다. 새로 자리 잡은 세계 역시 무엇과 무엇으로 구분되는데 뭐가 우위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모르고 싶다. 그러면서도 나는 구분 짓는다. 그때처럼 어떤 이들은 고무보트나 냉동 트럭에서 발견된다. 국경을 넘은 경우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여전히 일부는 숨을 쉬지 않는 상태로 발견된다. …다수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일 것이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나는 조깅하거나 걸으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을 알고, 가끔 비닐봉지와 집게를 들고 길을 나서기도 한다. 책은, 책은 읽지 않는다. 이론서도, 소설과 시도, 에세이도 읽지 않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글을 안 읽는 건 아니다. DSM-5에 따르면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구분된다. DSM가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라는 것과, 5가 다섯 번째 개정판을 가리킨다는 것은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을 읽다가 알게 됐다. 지완과 나라 같은 이름은, 데리다와 지젝 역시 내 일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내 오랜 습관이었던 너도 그렇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마음이 철렁하는 순간에 나는 더 이상 너를 찾지 않는다. 네 안위를 묻지 않는다. …너를 찾던 밤은 내 안위를 위해 존재했음을 안다. 가끔 네게 자몽의 뜻을 말하는 꿈을 꾼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네가 모아온 몇몇 이야기는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쓰나미 이후를 다룬 재난 다큐, ⟨그것이 지나간 자리⟩가 좋았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너와, 네가 모은 단어들은 어쩌면 지키고자 하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음이 흐릿한 밤, 드디어 나는 한 걸음 내딛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어떤 이에게 조금은 가까워진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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