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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7. 2023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12

   휴대폰의 비행기모드를 해제하자 메시지가 바삐 들어왔다. 언니, 얘 봐. 형인이 남겨둔 링크를 눌러보니 누군가의 트위터에 접속됐다. ‘분반 이동하라는 이상한 여자 때문에 강의 놓칠 지경이다.’ 이상한 여자가 우리 말하는 거지?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데. 형인의 푸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 문장의 ‘여자’가 담당 강사인지 조교인지 모호하지 않나. 게시물이 되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교수나 강사일 테니 곧 교체될 청소도구는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근근이.


   트위터를 찬찬히 살펴봤다. 윤정은 지난해 편입에 성공했고, 대학원 진학을 고민 중이었다.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에게 <빅이슈>를 사고 구호단체에 후원도 한다. 아프리카 말라위의 후원 아동에게 받은 사진과 편지를 넘겼다. 빨간색 티셔츠와 군청색 바지를 입고 신발까지 신은 채로 잠든 아이의 사진도 있었다. 침대가 아닌 해변의 모래 위였고 결코 깰 수 없는 잠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평범한 아이와 평범한 장소가 만들어 낸 비극적인 사진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사람들은 먼 데서 일어난 타인의 일에 애도를 표했다. 윤정 역시 그러했다.


   윤정의 #pray for를 보고 있자니 허기가 졌다. 서둘러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이곳은 그때의 영화관이고, 나는 그때의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쁜 숨을 들이켜며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여전히 좁고 어둡고 의자는 열다섯 개뿐인 그곳에서 대걸레를 든 알바생이 나를 쳐다봤다.


   “어, 마감했는데…. 잠깐만요.”


   안쪽 기둥 너머로 사라진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가득 든 투명한 유리컵을 들고 나타났다. 미소라멘만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테이블에 앉아 물로 마른입을 적셨다. 이내 두건을 두른 남자가 나타났다. “윤정 씨 먼저 가봐.” 그 말에 서둘러 앞치마를 벗는 여자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남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알바가 좀 지쳐 보인다고, 주문 꼭 받아달라고 해서 드린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고통이니 정말이지 괜찮아요. 게다가 곧 지나갈 테니까요. 근데, 지금 너무 자몽한데 시오는 어디 있을까요? 자몽, 한국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새어 나오려는 말 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신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온몸

에 훈기가 돌았다. 그때처럼 진하고 묵직한 국물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습관처럼 함께하던 이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 그뿐이었다. 초록 양말은 그새 낡아 발목에서 흐느적거렸다. 빨간 니트가 어디 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라멘 국물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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