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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7. 2023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11

   보름 후 나는 시오와 함께 그때처럼 싸얌과 스쿰윗, 사톤과 칫롬, 펫차부리와 아리, 얼마 후에 잊힐 이름의 동네들을 걷고 또 걸었다. 구글 맵을 켜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오의 경험과 감으로 행선지를 결정했다. 종종 쇼핑몰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며 코코넛 주스나 태국식 밀크티 차옌빤을 마셨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낯선 말들을 속에서 시오는 내게 태국 사람들은 ㅅ과 ㅆ을 구분하지 못하는 편이고, 그래서 Siam이 싸얌으로도, 사얌으로도 들린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Sukhumvit은 스쿰빗이 아니라 스쿰윗이라고 부르는데 그건 여기선 V로 표기하나 W로 발음해서 그런 거라고, 산스크리트어였나 팔리어의 영향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는 언어와 문화가 뒤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신기하다는 대화도 나눴다. 쇼핑몰을 나와 주홍색 꽃들로 둘러싸인 낮은 건물을 지나려는데 이국적인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화려한 탑과 색색의 꽃들, 줄지어 서 있는 백화점과 호텔 사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은 에라완 사원이었다. 시오가 말했다.


   “여긴 힌두교 브라흐만을 모신 곳이야. 불교 국가에서 좀 특이한 건데 다들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암튼 인도에 가면 브라흐만 사원은 거의 없고 비슈누, 쉬바, 가네쉬, 하누만이 훨씬 인기 있어. 여기도 좀 복잡한 게 남부로 내려가면 무슬림들이 많아. 팔십 퍼센트는 될걸. 딥사우스로 불리는 지역들이 있거든. 나라티왓, 얄라, 빠따니, 송클라. 이런 곳에 가면 무장한 반군들이 있고 테러 위험도 있어. 바다도 맑고 아름답고 거리도 멋진데, 사람들이 이토록 평범하게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데, 그래서 슬프기도 하더라. 혜령, 지금 어디 있어? 내 말 듣고 있어?”


   창조의 신 브라흐만과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쉬바는 나와 무슨 상관일까. 코끼리 형상의 가네쉬와 원숭이 형상의 하누만은, 내 관심 밖에 있었다. 아까 먹은 팟타이와 똠얌꿍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기름졌고, 뒤늦게 똠얌꿍 안에 있던 레몬글라스가 조금 역했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시오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라면이나 먹자.”


   우리는 스튜디오에서 신라면을 먹으며 이게 한국의 맛이라며 웃어댔고, 함께 처음 먹었던 라멘 국물이 미소였는지 시오였는지로 티격태격했다. 노란 망고에, 초록 망고까지 배불리 먹고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창문 너머 눈썹달이 초승인지 그믐인지로 또 싸우는데 시오가 초록색 양말을 내 캐리어 안으로 휙 던졌다. “돌아가면 그때 줘.” 싸얌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좌판을 지날 때 마음에 드는 눈치여서 내가 얼른 계산한 양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공항으로 떠나기 몇 시간 전이었다. 시오의 스튜디오가 있는 동네를 걷는데 앞서가던 시오가 걸음을 멈췄다.



   With smiles and kisses,

   we prefer to seek accord beneath our star,

   although we’re different(we concur) just as two drops of water are.


   -Wislawa Szymborska, Possibility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내 기억이 맞는다면 ‘두 번은 없다’인데.”


   출입문 유리에 새겨진 시구를 보며 느릿느릿 말하던 시오가 가게 문을 열었다. 검은 철제 프레임 탓인지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회색 리넨 셔츠를 입은 여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시오 역시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걸 보니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마자 시오는 <두 번은 없다>를 검색했고, 나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빨간 펜을 내밀 기세인 시오를 달래야만 했다.


   “제목 좀 틀린 거 가지고 왜 그래. 주인이 자기가 썼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둬. 안 본 사이 논문 쓰기로 마음먹었어? 출처 달아?”


   살짝 열린 창문에서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종 모양의 풍경이 내는 소리 사이로 끈적거리는 바람도 불어왔다. 나는 꿉꿉한 뺨을 만지며 생각했다. 보통의 시오라면 틀린 채로 두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라 말할 텐데. 시오에게서 유연함과 익숙함이 느껴졌고, 여행이 아닌 생활하는 중이라는 인상까지 받았지만 다 착각이라고, 지친 게 분명하다 싶었다. 나는 근근이 사는 게 지치지 않느냐고 물었고, 근근이 아니라는 시오에게 그게 아니라면 뭐냐고 되물었다

.

   “저축이지.” 마땅치 않다는 듯 시오의 윗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일종의 적금이랄까. 정기적금 말고 자유적금 같은 거.”


   “탈 수는 있고?” 그렇게 내뱉고는 앞에 놓인 스무디를 빨대로 세게 빨았다. 망고의 노골적인 달콤함을 자몽의 미묘한 씁쓸함이 덮어버렸다. “영원히 탈 수 없는 적금인 건 아니고? 아니지, 만기일도 없는데 무슨 적금이야. 그래 적금이라고 치자. 근데 어느 날 화폐 가치가 폭락한다고 생각해 봐.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망고자몽 스무디를 먹을 수 있던 돈이 쓰레기가 되는 거야.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단정할 순 없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잖아.”


   옆에 있는 커피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안에 든 얼음이 너무 자잘해서 입 안 가득 찼다. 아프게 차가운데도 입 안을 맴도는 씁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시오는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가 입을 열었다

.

   “시장에 갔는데 그날따라 자몽이 안 보이는 거야. 직원한테 자몽 있냐니까 머뭇거리더니 망고랑 망고스틴을 내밀더라.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나 싶어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그레이프 프루츠를 달라니까 뒤에서 자몽을 가져오는 거야. 자몽, 걔는 되게 영어처럼 생겨가지고 영어가 아니래.” 시오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혜령, 그거 알아? 포르투칼에서 잼보아였던 게 일본으로 가서 자봉이 됐고 한국에서 자몽이 된 거래. 근데 이 커피, 너무 쓰다.”


   시오는 작게 흥얼거렸다. 아, 아, 아, 아. 그 허밍을 들으며 나는 스무디 빨대를 커피잔에 집어넣고 이리저리 저어 버렸다. 시오는 빨대 두 개가 꽂힌 잔을 쳐다볼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빨간 니트를 꾹 붙들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시오에게 보기만 해도 덥다고, 일 년 내내 더운 곳에 처박혀 있으면서 이런 건 왜 들고 있냐고 핀잔했지만 정작 방콕에서 지내는 동안 에어컨 바람 탓에 니트를 유용하게 쓴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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