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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7. 2023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10

   박사과정을 수료한 직후였으니까 설 연휴였을 것이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꼬를 튼 이는 작은아버지였다. 그는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언제까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부모 피를 빨 거냐며 얼른 취직해서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옆에서 큰어머니가 맞장구쳤다. 여자는 배운 년이나 못 배운 년이나 동네 사우나에서 발가벗고 있으면 다 똑같다, 아파트 쉼터에 가봐라, 소학교도 못 나온 할마시나 여고 나왔다며 으스대는 할마시나 자식 자랑으로 입이 마를 날 없고 남 험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말했다. “집에 데리다와 지젝을 놔드려야겠네요.” 대리석과 자작나무의 이상한 조합을 떠올릴, 아니 세상살이 무서운 줄 모르고 공부만 하던 조카가 살짝 돈 건 아닌지 의심할 어른들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는 돈과 함께 해주세요. 마음만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말버릇이 그게 뭐냐며 엄마에게 등을 맞았다. 친구들은 하나둘 며느리나 사위를 얻었고 아직 손자가 없는 엄마는 자랑할 구석 하나 없는 답답한 딸만 있을 뿐이고, 내 원룸 보증금은 부모님의 노후 대비 통장에서 나왔다. 과외를 몇 개 뛰고 논술 첨삭을 얼마나 해야 보증금을 반환할 수 있는지 계산하니 어지럼이 일어서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갈 곳은 없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나는 걷고 걸었다. 문 닫힌 분식집과 카페를 지나서, 문은 닫혔는데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조명 가게도 지났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문이 열린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했다. 문을 열자 직원들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버거킹입니다.”


   버거와 음료 주문을 마치고는 빈자리에 앉아 아까 했던 말을 곱씹었다. 데리다를 읽어댄들 무조건적인 환대를 베풀 아량도, 지젝을 읽어댄들 타자의 욕망을 침범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으나 그것들이야 책에서 하는 말이기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글과 삶이 일치되는 경우는 드물 테고, 내가 그 미약한 확률에 뽑힐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학위를 딴다 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인서울은 바라지도 않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1호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며 경기도와 충청도를 떠돌아야 한다. 아니지, 불러만 주면 감사할 일이었다. 골품제를 버리고 새로운 신분제를 택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나는 무신분의 사회를 꿈꾼 게 아니라 육두품보다 더 위로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시도는 실패했고 경로를 변경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차라리 시오가 현명했다. 내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어쨌거나 일관된 행보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며칠 전 시오는 고향의 맛이라며 버거킹 와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진을 보내왔다. 다국적 기업의 음식을 먹고 자란 이에게 고향의 맛이 차지한 영역은 넓었다. 태국 산간 마을에서 머물다가 지난주부터는 방콕 변두리에서 지낸다며 스튜디오 사진도 보냈는데 나쁘지 않았다. 학교 앞 창문도 없는 고시원 방과 비슷한 가격이었으나 크기나 방음 등을 따져볼 때 거주의 질은 훨씬 높았다. 마트나 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사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으니 어떤 면에선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전과 달리 시오는 매일 시간을 할애하여 일한다고 했다. 전사(轉寫)나 논술 첨삭을 하고,  SNS에서 보기 좋은 짧은 영상의 멘트를 만들고 있기엔 내다 버린 육두품이 아까웠으나 시오의 계산법에 따르면 강을 건넌 지 오래된 이에겐 서울에서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돈을 받으며 하는 일보다 한글이 깔린 노트북이 있고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나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40리터짜리 배낭에서 늘지도 줄지도 않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시오에게는 자신의 공간을 내어줄 마음도 있었다. 다음 학기부터 수도권 한 대학에 출강하기로 했고, 통장 여윳돈을 써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순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와퍼와 커피는, 내게 고향의 맛은 아니었으나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나는 반쯤 먹은 와퍼를 내려놓고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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