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과 DC의 두 히어로
블랙 위도우와 할리 퀸. 두 캐릭터의 공통점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굉장히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죠. 가장 많이 나올 만한 질문은 바로 현재 가장 유명한 여성 캐릭터 중 한 명이라는 것이겠죠. 마블과 DC, 슈퍼히어로 문화를 주름잡고 있는 두 회사를 대표하는 여성 캐릭터 두 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최근 들어 여성 슈퍼히어로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고, 블랙 위도우와 할리 퀸이 첫 여성 히어로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벤져스 원년 멤버인 블랙 위도우와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인기를 끌어올린 할리 퀸만 한 캐릭터는 없겠죠.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조금 다릅니다. 글을 읽는 분들은 쉽게 떠올리지는 못할 수도 있는 공통점이죠.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DC 확장 유니버스, 각 유니버스에서 유일하게 브래지어를 노출한 여성 슈퍼히어로라는 점입니다.
더 깊게 나아가기 전에, 이 둘 외에도 브래지어를 노출한 여성 캐릭터들이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올 것 같아서 그 점 먼저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페퍼 포츠가 <아이언 맨 3>의 후반부에서 상반신에 브래지어만을 입은 채 활약을 선보였고, 실제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슈트까지 입고 전투에 참여하였기에 그녀를 포함하려는 생각도 있었으나, 페퍼 포츠는 히어로라기보다는 히어로의 히로인, 조력자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은 제외시켰습니다. 같은 유니버스에서는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시빌 워>에서 스칼렛 위치가 가슴골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등장해 브래지어를 조금 노출하였는데, 본 글에서는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브래지어를 노출한 경우만 다루려고 하기에 그녀는 제외시켰습니다. 같은 이유로 <버즈 오브 프레이>의 블랙 카나리 역시 포함되지 않습니다.
옷 사이로 끈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얇은 옷 사이로 비치는 것도 아니도록 브래지어 노출의 기준을 까다롭게 잡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성들만 착용하는 속옷인 브래지어는 립스틱, 하이힐 등과 함께 여성성을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이런 이유, 게다가 여성의 가슴을 감싸고 가리는 속옷이라는 점에서 성적인 면모 역시 부각되죠. 따라서 자연스레 여성의 성적 대상화나 묘사 측면에서 다루거나 기준점으로 삼기에 좋은 지표입니다. 이쯤 되면 제가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본 주제가 무엇인지 아시겠나요? 여성 히어로를 대표하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으며 노출한, 여성성을 대표하는 속옷을 통해 여성 캐릭터/히어로가 다루어지는 방식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도록 하죠. 블랙 위도우와 할리 퀸은 모두 각 유니버스 내에서 브래지어를 노출한 작품 및 횟수는 총 두 번입니다. 블랙 위도우는 2010년 <아이언맨 2> 그리고 2020년 <블랙 위도우> 에서죠. 할리 퀸은 2016년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두 번째 등장 2020년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 브래지어를 노출했습니다. 두 여성 캐릭터 모두 실사 데뷔작부터 첫 노출을 하고, 이후 시간이 지나 두 번째 노출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허나 첫 번째 노출과 두 번째 노출은 굉장히 다릅니다. 노출이 어떤 식으로 연출되는지부터 그 장면에서 블랙 위도우와 할리 퀸이 입고 있던 브래지어까지도 말이죠. 먼저 블랙 위도우부터 시작해서, 두 노출씬이 어떻게 다르며 묘사 방식 역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이언맨 2>에서 첫 등장하는 블랙 위도우는 매력적인 몸매와 외모를 가진 여성 조력자 히어로로 등장합니다. 그녀의 첫 등장 장면에서 토니 스타크는 그녀의 과거를 검색하면서 화보 한 장을 꺼내듭니다. 바로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 나타샤의 사진이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델의 이미지처럼, 하얀색 옷감을 깔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검은색의 속옷만을 입고 있습니다. 브래지어도 단순 속옷이 아닌 레이스와 장식이 달린 란제리 속옷이죠. 두 번째 노출은 그녀의 정체가 밝혀진 뒤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차량의 뒷좌석에 탑승한 채로 이동하면서, 빠르게 드레스에서 전투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죠. 몸 전체가 나오지는 않지만, 드레스를 벗으면서 가슴에 차고 있는 검은색 브래지어를 노출합니다.
이 두 장면의 기능, 목적은 단순합니다. 블랙 위도우/나타샤의 성적인 매력을 부각하는 것이지요. 화려한 외모에서 그치지 않고 브래지어만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주의를 끄는 것이죠. 주목할 점은 이 두 장면은 완전하게 '메일 게이즈(Male Gaze, 남성 시청자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여성 등장인물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연출 및 시선)'에서 촬영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메일 게이즈는 세 가지 측면으로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카메라 뒤에서 영화를 만드는 남성 연출가의 시선, 둘째는 해당 장면 내에서 여성 인물을 바라보는 남성 캐릭터의 시선, 마지막으로는 영화/장면을 감상하는 남성 관객의 시선이죠. 첫째와 둘째의 시선은 이 두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물론 세 번째 측면 역시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이언맨 2>에서의 첫 등장 이후 10년 만에 나온 솔로 영화이자, 나타샤의 마지막 등장인 <블랙 위도우>에서 그녀의 노출은 매우 다르게 연출됩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여겨볼 점은 <아이언맨 2>와 <블랙 위도우>에 등장하는 시선의 차이겠죠. 전자에서는 장면을 연출하는 시선과 다른 캐릭터들의 시선 모두 남자의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다릅니다. <블랙 위도우>는 여성 감독인 케이트 쇼트랜드가 연출했을 뿐 아니라, 본 장면에서 나타샤와 그녀의 브래지어를 바라보는 인물은 그녀의 여동생인 엘레나죠. 자연스레 나타샤를 바라보는 목적 역시 다릅니다.
<아이언맨 2>에서는 블랙 위도우의 성적인 매력과 몸매를 감상하는 시선이었다면, <블랙 위도우>에서는 그녀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죠. 사실 엘레나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이 그녀의 브래지어를 바라보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검은색 브래지어 끈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등과 등의 상처입니다. 나타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고 몸을 써 왔는지를 보여주고, 엘레나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과 동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죠. 이 장면에서 나타샤가 착용한 브래지어는 화려한 레이스나 장식이 달리지 않은 소박한 디자인이라는 점, 그리고 가슴이 있는 앞부분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등만을 보여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아이언맨 2>에서 <블랙 위도우>까지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미투 운동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포함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입지는 더욱 커졌죠. <블랙 위도우> 역시 그런 시대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마블의 시도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단지 블랙 위도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여성들을 세뇌하고 착취하는 악당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같은 검은색 브래지어를 노출했지만, 서로 다른 두 영화의 장면은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성적인 대상에서 하나의 캐릭터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메일 게이즈에서 피메일 게이즈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블랙 위도우의 변화를 다루었으니 할리 퀸으로 넘어가 볼까요. 사실 할리 퀸은 주류 블록버스터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화가 된 캐릭터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만큼 내용도 블랙 위도우에 비해서 더 길어지지 않을까 하네요. 할리 퀸의 브래지어는 블랙 위도우에 비해 그 존재감(?)이 더 크고 노골적입니다. 촬영장에서 유출된 모습에서부터 할리 퀸의 브래지어는 얇은 하얀색 상의를 뚫고 존재감을 드러냈죠. (글 도입부에서 단순한 비침 등은 다루지 않겠다고 했으나,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할리 퀸을 브래지어를 이용해 대상화하는 정도가 워낙인지라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공개된 각종 잡지 커버와 포스터들에서도, 할리 퀸은 몸매를 드러내는 포즈를 취하며 가슴 옆쪽으로 비치는 빨간색 브래지어를 강조했습니다. (보시겠지만 가슴의 컵 부분만 빨간색이고, 어깨와 등의 끈, 밴드는 검은색입니다)
할리 퀸의 브래지어 강조는 예고편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단순하게 비치는 브래지어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복장을 착용하는 과정에서 셔츠를 입기 직전 브래지어만을 착용한 상반신을 짧게 노출한 것이지요. 당시 <배트맨 대 슈퍼맨>의 실패로 DC 팬덤의 기대가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쏠려 있던 터라, 이러한 노출 및 성적 매력의 드러냄은 많은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본 장면은 영화 본편에서 더욱 길고 노골적으로 연출되죠. 옷을 입는 할리 퀸의 하반신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다리와 허벅지, 복부를 순서로 천천히 그녀의 몸을 훑습니다. 그러다가 빨간색 브래지어를 찬 그녀의 가슴을 보여주고는 셔츠를 내려 입는 모습이죠.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아이언맨 2>처럼 메일 게이즈가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카메라의 이런 시선은 남성 감독, 캐릭터, 관객 모두가 할리 퀸의 몸을 감상하도록 만들죠.
브래지어를 보여주고 섹시함을 강조하더라도 얼굴과 가슴(브래지어)을 한 프레임에 담았던 <아이언맨 2>와는 달리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할리 퀸을 대상화하는 정도가 훨씬 강합니다. 카메라의 시선 앞에서 그녀의 몸은 완전한 성적 도구로 전락하고, 빨간색의 브래지어는 그 화룡점정이죠. 이후 상의를 벗고 브래지어만 입는 장면은 다시없지만 하얀 상의 사이로 브래지어가 계속 비치는 등, 노출은 계속됩니다. 할리가 물에 젖는 최후반부 전투씬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브래지어가 비칠 뿐 아니라, 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대상화의 정도는 심해지죠.
하지만 블랙 위도우와 마찬가지로, 할리 퀸 역시 이런 첫 모습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2020년 <버즈 오브 프레이>의 할리 퀸은 영화 초반부에는 왼쪽처럼 시스루 옷 아래로 분홍 브라렛을 착용하고, 이후 영화 대부분은 오른쪽의 분홍색 스포츠 브라를 착용합니다.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 할리 퀸은 스포츠 브라만을 입거나, 속옷이 비치는 하얀 상의를 입거나, 아니면 브라 위에 다른 옷을 걸쳐 브라를 노출하는 식으로 옷을 입죠. 언뜻 보면 잠깐 동안만 브래지어를 보여주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보다 노출도가 올라간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실제로 <버즈 오브 프레이>를 다루면서는 브래지어를 노출하는 특정 한두 장면만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작의 할리 퀸과 본작의 할리 퀸을 차별화하는 것은 시선과 연출입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브래지어 노출 장면처럼 그녀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으면서 브래지어를 클로즈업해 보여주지도 않고, 남성 캐릭터들과 카메라가 할리를 성적으로 대상화하지도 않습니다. 여성 감독인 캐시 얀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자연스레 피메일 게이즈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겠죠. 가장 중요한 것은 브래지어의 기능입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할리 퀸의 가슴과 몸매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더라면,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할리 퀸의 자유분방한 성격 및 여성성을 보여주며, 그녀의 패션 센스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겠죠. 와이어와 후크, 끈이 있는 빨간색 푸쉬업 브래지어와는 달리 분홍색 스포츠브라는 착용하는 여성의 편안함, 그리고 디자인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렇게 두 여성 캐릭터의 두 노출, 그리고 그 두 노출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봤습니다. 서로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죠. 장면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었듯이, 최근 들어 여성 캐릭터들의 성적 대상화는 줄어든 편입니다. 캡틴 마블, 케이트 비숍, 사이클론, 슈퍼걸 등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노출 없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할리 퀸 역시 이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향성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고, 완벽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과거와 비교해서 이루어낸 변화가 눈에 띄는 것도 사실입니다. 브래지어라는 작은 옷감/속옷 하나로 이런 긴 글도 쓸 수 있다는 것도 글을 완성하고 나서야 제대로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