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그리는 근미래 미국 내전
지난주에 포스터를 공개하고 예고편 공개가 임박했음을 알린 <시빌 워>의 예고편이 드디어 공개되었습니다. 예고편과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기본적인 정보, 줄거리와 출연진부터 다시 훑어보도록 하죠. <엑스 마키나> <어나힐레이션> <멘>을 감독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신작이며, 근미래 미국에서 내전이 발생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엑스 마키나>와 <멘>에 이은 또 다른 가랜드 감독과 A24의 협업이며, 내년 4월 26일 북미 개봉이라고 하죠.
커스틴 던스트가 알렉스 가랜드 감독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하며, 주인공인 전쟁 기자 역을 맡는 듯 보입니다. (생각해 보니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여성 주인공을 많이 내세우는군요) 그 외 출연진들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가랜드 감독의 2020년 TV시리즈 <데브스>에 출연했던 배우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데브스>에 케일리 스패니, 스티븐 맥킨리 헨더슨이 예고편에 얼굴을 비추었고요, 예고편에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역시 <데브스>에서 세르게이 역을 맡은 칼 글루스먼 역시 출연한다고 합니다. <데브스>에서 중요한 역으로 등장했던 닉 오퍼먼이 <시빌 워>에서는 미국 대통령 역을 맡았는데, 닉 오퍼먼의 출연은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라 예고편을 보고 놀랐습니다.
닉 오퍼먼 외에 예고편으로 출연이 공개된 배우는 또 한 명이 있죠. 바로 제시 플레먼스입니다. 보아하니 미군 중 한 명으로 나오는 듯한데, "당신은 어떤 미국인인데요?"라는 대사가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실제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가장 기대되는 배우 중 한 명이죠.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작품 전부 출연한 배우가 있는데, 바로 일본계 영국인인 발레리나, 모델인 소노야 미즈노입니다. <엑스 마키나>에서는 동양인 AI '쿄코' 역으로 출연했으며, <어나힐레이션>에서는 후반부 휴머노이드 외계인의 모션 캡처를 맡았다고 하죠. 그러나 <데브스>에서 드디어 주인공 역을 맡았으며, <멘>에서는 경찰관 무전 목소리로 잠깐 출연했다고 하죠. <시빌 워>의 출연진 목록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예고편의 1분 35-36초 경에 나오는 안경을 쓴 검은 머리 여성이 바로 미즈노 배우가 아닌가 싶네요. 자세한 것은 영화를 봐야 알겠죠?
예고편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 중 하나는, 바로 SF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알렉스 가랜드가 지금까지 감독하거나 각본에 참여한 작품들은 거의 빠짐없이 전부 SF나 판타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좀비영화였던 <28일 후>에서 시작해 <선샤인>, <네버 렛 미 고>, <엑스 마키나>, <어나힐레이션>, <데브스>에서는 복제인간에서부터 AI, 외계인, 양자컴퓨터 등 SF 장르 구석구석을 탐구했죠. <멘>은 SF 장르는 아니었지만 아방가르드한 심리 공포 장르였기에, 환상/판타지적인 향이 가미된 작품이었습니다. 실제로 개봉 전 레터박스나 IMDb에서도 본작의 장르에 SF를 추가하고 있었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기계, 로봇 등을 가미한 미래 전쟁물이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사실상 현대전에 가까운 모습이네요.
바로 그 현대전이라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시빌 워>는 <멘>이 개봉한 2022년도에 촬영을 시작하고 마쳤으며, 2022년도 여름에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인터뷰에서 VFX 숏이 굉장히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정도까지 오래 걸릴지는 몰랐지요. 배경을 바로 당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가까운 현재~미래로 설정한 점, 무엇보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2024년도에 개봉한다는 점을 보아 아무래도 본작에서도 미국의 분열된 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두 번째 미국 내전이라는 줄거리, <멘>과 동반작 (Companion Piece)라고 묘사한 가랜드 감독의 말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메시지가 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죠. (<멘>에서는 젠더 관련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과연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 궁금해지죠. 이와 관련해서 예고편의 대사/설정 중 하나가 소소한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초반 뉴스 브리핑에서 알 수 있듯이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내전에서 연합을 했다는 것이죠. 전통적으로 보수/공화당 성향이 강한 텍사스와 반대로 진보/민주당 성향이 강한 캘리포니아가 같은 편에 섰다는 사실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등, 그 둘이 왜 연합했는지 궁금해서라도 영화를 봐야겠다는 등 재미있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영국인인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기본적인 미국 정치와 사회를 읽어낼 줄 모르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데, 아무래도 구체적인 메시지나 줄거리, 배경은 영화가 나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테스트 시사회를 다녀온 유저의 말에 의하면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연합의 정치적 관계 같은 것보다는, 이런 내전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고 합니다.
SF, 판타지적 색채가 빠졌다는 점, 평소보다 거대한 스케일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알렉스 가랜드 영화와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예고편을 보면서도 <시빌 워>가 알렉스 가랜드의 작품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촬영, 영상미죠. 본작의 촬영감독은 롭 하디가 맡았는데, <엑스 마키나>부터 <데브스>까지 알렉스 가랜드가 감독한 영화들은 쭉 촬영을 맡아온 촬영감독입니다. 실제로 영상 특유의 색감과 생생한 느낌,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피사체만 선명하게 잡는 숏들까지, 가랜드 영화의 시각적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고편 중간에 제시 플레먼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뒷배경의 숲과 플레먼스의 선글라스가 대비를 이루는데, 이렇게 초록색과 빨간색을 한 장면에 담았다는 점에서 <멘>의 영상미가 더욱 떠올랐습니다.
하여간 예고편이 제 기대와는 조금 달라서 심심하기도 했지만, 계속 보다 보니 여전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네요. <멘>이 호불호가 많이 갈렸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게 봤기 때문에 <시빌 워>도 재밌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헬리콥터와 전투기뿐 아니라 탱크, 폭발 등까지. 가랜드 감독이 본작을 '전쟁 영화'라고 묘사했을 때 그 정도가 어떨지 궁금했는데, 제 기대치와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꽤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가 나온 듯하네요. 이런 면에서는 알렉스 가랜드 감독작들 뿐 아니라 A24의 영화들 중에서도 꽤 큰 스케일이 아닌가 싶었는데, 실제로 얼마 전 <시빌 워>가 역대 A24 영화 중 최고의 제작비를 자랑한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7,500만 달러의 제작비인데요, 물론 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보다는 많이 적은 제작비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A24의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든 영화들과 비교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3,500만 달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가 2,500만 달러) 7,500만 달러는 굉장히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죠.
이와 관련해서, A24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달 전 A24에서 앞으로 액션 영화나 IP 프랜차이즈 영화 쪽으로 확장해 나가겠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최근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흥행에 실패한 후 더 대중적인 영화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추척도 있었지요. 이와 관련해서 <시빌 워>도 거대한 제작비와 전쟁 액션 영화라는 특성상, A24의 이러한 정책에 해당되는 첫 사례 중 하나가 아니냐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최근 베니 새프디 감독에 드웨인 존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를 발표하고, 코지마 히데오와 협업해 <데스 스트랜딩> 영화화를 진행한다는 뉴스가 있었지요. 어찌 되었든, 앞으로 A24에서 기존과는 조금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훌륭한 영화들로 팬층을 얻고 사랑받아온 A24이기에, 이 시도를 흥미 있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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