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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이야기 - 2부:

깊은 바다에서 일어난 일

by xhill

머나먼 광활한 바다의 어딘가....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낮이면 바닷속으로 빛줄기를 내리쬐어 모래를 따뜻하게 덥히고 물고기들을 간지럽히던 태양은 다른 세계로 모습을 감추고 어둠과 차가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태양의 자리에 떠오른 달의 은은하면서 새하얀 빛은 바다 아래로 스며들었다. 비록 태양의 것만큼 강렬하지도 않고, 수면 아래의 얕은 바다에 미치는 손길도 약했지만 달빛은 자기보다 작은 별빛의 도움을 받아 바다의 수면 위에 몽환적인 세계를 풀어놓았다. 바다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수면을 바라본다면 일렁이는 물에 비쳐 파도가 치고 물결이 생길 때마다 춤을 추며 모양을 바꾸는 달이 보일 터였다. 자연이 부리는 이런 신비로운 광경은 낮이 아닌 밤에만, 그것도 달과 별이 환하게 뜨는 날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마법이었다.


이 바다는 다른 넓고, 거대하고 깊은 바다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위치한 바다였다. 깊이는 그렇게 깊지 않아 달빛과 별빛의 하모니가 물속까지 비쳤으며 모래와 바위 등 바다의 자연물들은 짙은 푸른색에 물들어 잠에 빠졌다. 이곳에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많은 물고기나 바다생물이 살지도 않았으며, 밤 산책을 나오거나 야행성의 습성을 가진 극소수의 작은 떼를 제외하면 바닷속을 누비는 생물도 거의 없었다. 밤이 되면 하얀 모래와 그 위에 일렁이는 물의 그림자만이 이곳을 차지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었지만 텅 빈 공허함 역시 이곳의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런 이곳의 바다를 누군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의 모래 바닥에 최대한 가깝게 붙어 이동하고 있어서 밤바다를 누비는 다른 생물의 눈에 쉽게 띄지 않을 터였다. 사람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가진 그녀는 빨간색 머리를 가지고 보라색 조개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초록색 꼬리는 수많은 별들이 모인 은하수와도 같아 어두운 바닷속에서도 홀로 반짝이며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한밤중에 왕국을 떠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떠나는 그녀의 이름은 에리얼, 아틀란티스의 인어공주였다.


왕실의 다른 누구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심지어 자신과 가까운 물고기와 바닷가재 친구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서 그녀는 초저녁과 새벽 중간에 정확히 위치한 한밤중의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만약 아틀란티스의 국왕, 그녀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바닷속의 화산 같은 뜨거운 적빛의 분노를 맛보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규칙을 어기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 하나가 있었다. 그녀가 풀어야 할 의문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바다에서 오직 하나뿐이었으며, 낮에는 결코 실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에리얼은 동화 같은 아름다움과 쓸쓸하고 차가운 적막감이 동시에 감도는/공존하는 바닷속의 아래언덕으로 향했다. 모래 바닥이 점점 낮아지면서 더 어둡고 차가운,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으로 이어지는 장소였다. 에리얼은 이곳에 많이 와본 적이 없었다. 한두 번 근처에만 헤엄을 쳐봤을 뿐, 그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와 설명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 아래언덕을 넘어 아래쪽으로 가는 것이 바로 국왕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래언덕 너머는 공주를 포함한 아틀란티스인 대부분에게 금지된 공간이었다. 왕의 명을 받은 사신 일부만이 잠시 동안 갈 수 있을 뿐이었다. 아래언덕을 가는 것뿐 아니라 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는 것 역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에리얼은 자신이 매고 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노란색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에리얼이 그것을 손끝으로 조금씩 어루만지고 쓰다듬자,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으면서도 앞의 길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돌에서 스며져 나왔다. 아래언덕 너머를 탐험할 때, 특히 밤에 탐험할 때 이런 준비물은 필수였다.


에리얼이 모래를 쓸면서 아래쪽으로 경사진 곳으로 넘어가자 언덕 아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쪽에는 밤바다의 몽롱한 푸른색이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나타나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거대한 구조물들의 뾰족한 실루엣과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구조물들 사이에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그 정체와 기원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모두 있었다. 에리얼은 자신이 어느 위치로, 무엇을 찾아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곳을 쓸데없이 누비거나 탐험을 하는 일은 목적이 아니었으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 깊고 가까이 아래언덕에 오는 일은 처음인지라 길을 잃고 의지와는 상관없는 탐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에리얼에게는 무섭게 다가왔다. 하지만 역시 이 작은 여정을 멈출 수는 없었다.


에리얼은 기괴하게 생긴 바위와 수중 구조물들을 지나갔다. 그중에는 이끼와 조가비가 낀 썩어가는 나무로 된 기다란 돛대도 있었다. 언덕아래는 난파선들의 묘지로서 역할도 했다. 에리얼들은 그 수많은 난파선 중 특정한 하나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그것을 찾는 과정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저 멀리서 작지만 뚜렷한 야광 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빛을 내뿜는 그것은 해파리들이었다. 에리얼은 이곳에서 야광 해파리를 보니 자신이 혼자라는 인식에서 오는 두려움을 조금 덜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계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거대한 바다 괴물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혹은 난파선과 바위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괴물이 실존하는지 아니면 아이들을 아래언덕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였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에리얼은 더 이상 이런 이야기에 겁을 먹는 인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의 호기심을 뒤틀린 방식으로 자극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 괴물은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알려진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정보와 이미지의 부재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괴물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자유자재로 끔찍한 모습들을 선보이며 그림자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려고 위협했다. 괴물은 바다 마녀가 키우던, 혹은 그녀가 만들어낸 존재라는 소문도 덧붙여졌다.


어느 정도의 하지만 그렇게까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에리얼은 난파선 하나를 마주했다. 그것은 다른 난파선과 구조물들에 비해서 크기는 절반 정도로 작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시야를 높게 유지했더라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난파선을 한번 바라보았다면 결코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찾던 난파선이었다. 그 난파선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뚜렷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보라색은 부러진 돛대에서 시작해 배의 갑판과 판자, 아래쪽까지 스며들어 갔으며 중간중간, 배의 앞쪽이나 맨 뒤쪽에는 보라색이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마치 배 위에 페인트를 들이부은 듯했다. 배가 만들어질 때 칠해진 보라색은 아니었다.


배의 특징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난파선들은 폭풍과 해일에 파괴되어 바닷속과 아래언덕 깊숙이 가라앉은 이후였지만 대부분 배의 형상은 유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몸통은 구멍이 숭숭 뚫렸을지라도 여전히 건재했으며 돛대와 갑판도 부러졌지만 남아 있었다. 이 난파선은 그렇지 않았다. 앞쪽으로 튀어나온 배의 얼굴 옆으로는 수많은 다른 배가 겹쳐 있는 듯 배의 뒷면과 돛, 갑판 등의 구조물들이 한 곳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배들이 충돌하거나, 하나의 난파선 위로 여러 난파선들이 내려앉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그렇게 배가 창조된 듯, 하나의 구조물에서 다른 구조물들이 연결되고 이어지면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배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음이 분명했지만, 왜 이런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에리얼이 찾는 난파선이었으며, 그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리얼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저 멀리 있는 해파리를 제외하면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어둠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혹은 잠을 자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타나지 않는 이상 움직여야만 했다. 에리얼은 그러고 나서 아래쪽으로, 난파선의 바닥과 아래언덕의 바닥이 연결되면서 나타난 공간으로 헤엄쳐 갔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잠시 난파선 쪽을 힐끗 쳐다본 에리얼의 눈에 환하게 빛나는 병과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난파선에 난 구멍 사이로, 난파선 안쪽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굉장히 작은 그것은 지금껏 보지 못한 은은한 청록색의 색깔로 그것은 빛나고 있었으며, 더럽고 파괴된 난파선과 불쾌한 바위들이 가득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빛나는 병과 탁자는 순간 에리얼의 시선과 관심을 끌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에리얼은 다시 시선을 아래쪽에 고정하고 숨을 가다듬은 채 헤엄쳤다. 이것이 어쩌면 아래언덕을 지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다. 난파선이 만들어낸 환영과 유혹에 이끌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없었다. 병과 탁자는 얼마 후 사라질 것이었다. 에리얼은 계속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에리얼은 드디어 아래쪽에 난 공간으로 이어지는 구멍을 발견했다. 좁은 굴과도 같았지만 에리얼은 주저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손에 꼭 쥐고 있는 돌을 앞쪽으로 내밀어 굴을 밝히면서, 좁은 굴 내부에 떠다니는 것들을 무시하면서 에리얼은 있는 힘껏 헤엄쳐 갔다. 이렇게 좁은 공간은 결코 기분 좋거나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다. 에리얼은 최대한 빠르게, 하지만 몸이 굴에 끼지 않도록 하면서 헤엄쳤다. 에리얼의 눈앞에 어느덧 굴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작은 원과 같은 그것에서는 빛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막다른 길도 헛것도 아니었다 - 에리얼은 계속해서 숨을 쉬면서 헤엄쳤다.


에리얼은 드디어 굴을 나와 넓은 공간으로 나왔다. 팔을 넓게 벌리고 꼬리를 흔들자 먼지가 떨어져 나왔다. 에리얼은 그러면서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바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근원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부시지 않으면서 은은하고 환한 빛이 위쪽 어딘가에서 스며져 나오고 있었으며, 그것에 손을 뻗어 닿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래쪽에는 바위를 정확하게 깎아 만든 상자 같은 구조물 여럿이 위치해 있었다. 아직 공간의 윗부분 천장에 가까운 에리얼의 옆에는 돌과 보석을 깎아 만든 거대한 얼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빛을 내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보석으로 되어 있어 그 내부의 구조와 선들을 볼 수 있었다. 벽은 역시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어떤 부분들은 바위처럼 까끌까끌하고 울퉁불퉁했지만 깨끗하게 닦이고 그림이 그려진 부분들도 있었다. 벽에는 어둠이 깔린 산맥과 그 앞에 놓인 호수에서 헤엄치는 인어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은 바다 마녀의 도서관이자 신전이었다. 에리얼이 위험과 경고를 무릅쓰고 오래전 자신이 무찌른 바다 마녀의 장소에 온 것은 며칠 전 그녀가 겪은 일 때문이었다. 태양이 내리쬐던 낮, 바닷속을 산책하고 자유롭게 헤엄치던 에리얼은 갑자기 자신의 주변 환경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아까 전의 바다 산호와 모래는 사라지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 인공 구조물이 자신의 아래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물고기 떼가 자신의 주변을 헤엄쳤지만 에리얼의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 아니었다. 에리얼은 그 물고기들에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환경과 물고기까지 모두, 에리얼 자신의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당황함에 휩싸였던 그새 짜증과 함께, 평소에는 느끼지 않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게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에리얼은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 희미한 빛의 직선과 반사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유리나 거울의 것과도 같아 보였다. 그것에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에리얼은 얼마 후 자신이 유리로 된 철장, 수조에 갇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포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직후, 마치 마법처럼 에리얼은 자신이 헤엄치던 바다로 돌아왔다. 꿈을 꾼 것도, 환영을 본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을 겪은 이후 며칠 동안 에리얼은 그 경험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은 예상치 못하게 그녀에게 날아와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 생각은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에리얼의 마음을 지배해서 더 이상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의 의문을 해결해야만 했고, 그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렇게 에리얼은 비밀에 싸인 계획을 세워 한밤중에 실행하게 된 것이다.


에리얼은 바다 마녀의 신전을 탐험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의 구조나 풍경,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마법의 흔적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할 것들이었다. 에리얼은 아래쪽에 아직 남아 있는 마녀의 책장들로 향해 -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할 책을 찾아 의문을 해소하기만 하면 되었다. 자신이 겪은 일에는 일종의 마법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에리얼은 단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흑마법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마녀의 책장은 낡아가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여전히 튼튼하고 견고했다. 여러 책장과 마녀의 탁자 위에는 버려진 촛대와 돋보기, 거울, 문의 손잡이로 보이는 것 등 물체가 가득했다. 그 위로, 책장에 남아 있는 책 사이에서 마법과 관련된 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녀의 책들은 이름을 부르거나 원하는 내용을 말하면 자동으로 그것을 찾아 주는 주문이 걸려 있었다. 마녀가 사라진 이후 다행히 그 주문은 풀리지 않고 남아 있는 듯했다.


에리얼은 상황 마법, 환영 마법, 변신 마법, 그리고 유리 마법 등 내용들을 뒤적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새벽이 되고 바다에 해가 떠오르기 전에 끝내야만 했다. 다시 이 신전과 아래언덕에서 나와 왕국으로 돌아갈 것까지 생각하면 에리얼은 더욱 빨라야 했다.


에리얼의 마음의 두근거림은 서서히 더 빨라졌으며, 그녀의 초조함은 마치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렸다. 긴장감과 초조함이 그녀의 얼굴까지 올라와 숨이 막히기 전, 에리얼은 마법 책의 한 내용에서 멈춰 섰다. 단어 몇 개, 문장 한두 개에서 멈춰 선 에리얼은 거기서 페이지 넘기기를 멈춘 다음 그 내용을 빠르게, 하지만 집중해서 읽어나갔다.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바다의 전설. 왕국의 조개와 진주로 장식된 동화책. 인어 여인들이 조개와 해초를 손질하면서 부르는 노랫말. 벽과 바위에 그려진 이어지는 그림들. 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매체이며, 그것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쓰고 만들어내며 읽고 즐기듯이, 모든 세계에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야기 안에도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으며, 이야기를 읽는 우리와 우리의 세계 역시 다른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그 안에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의 구멍은 계속해서 이어지며 그것은 끝이 없다....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야기에 속해 있다. 또한 안쪽 깊숙한 곳에 있던 이야기가 먼 바깥쪽에 위치한 외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뒤틀리면서도 규칙을 거스르는 현상 또한 있을 수 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마법 중, 흑마법이 아닌 순수하고 기본적인 마법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생명 이전, 시간과 세계와 바다가 창조된 이후 최초의 존재와 선각자들이 행한 최초의 마법 중 하나이다. 바로 글과 음악, 그림과 극 등을 매개, 문처럼 삼아 - 이야기와 이야기를 넘나들 수 있는 마법이다.


그 주체와 객체, 방법은 수없이 다양하고 다르다. 이야기 속의 존재를 우리의 현실로 불러낼 수도 있으며, 우리가 바깥의 어떤 이야기로 불려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자의가 개입될 수도, 무의식적이거나 타의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이야기 속으로 건너가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최상급의 마법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렇게 이야기 사이에 문을 열고, 이야기 속이나 밖을 드나들 때는 강렬한 감정이 필요하다. 사랑, 희망, 열정, 그리움 등 긍정적이고 순수한 감정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문은 안정적이지만 효과가 크지는 않다. 하지만 분노나 증오, 질투, 욕망, 혹은 다른 것에 대한 증오나 파괴를 위해 대상을 생각하고 갈망하는 경우처럼 부정적 감정으로 마법을 행하는 경우에는 - 빠르고 확실하며 불안정하지만, 그에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불러내는 자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문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다.


이 마법은 특별한 주문이 필요하지 않다. 위의 강렬한 감정들을 가지고 이야기 속의 대상을 원하거나 이야기로 넘어가기를 원할 때 -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항상 문제없이 성공하는 마법은 아니다.


우리는 다 이야기 속을 살아가며, 우리는 모두 이야기들을 쓰고 들려준다.'


에리얼은 내용을 다 읽고 나서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음과 정신을 옭아매고 차지하던 의문은 서서히 풀려나갔다. 에리얼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전말이 천천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속한 이야기 바깥의 또 다른 이야기의 누군가가 - 자신을 강렬하게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의식적으로 부린 마법의 이면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에리얼이 새로운 세계, 바깥 이야기의 세계로 이동하면서 느낀 당황감과 짜증, 그리고 공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작스럽고 이상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법의 책을 읽은 에리얼은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던 짐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한층 가벼워졌고, 그녀의 몸은 위쪽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에리얼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새로운 생각거리가 나타나 있었다. 이전의 것처럼 모든 생각과 정신을 지배하거나 참을 수 없는 의문을 주지는 않았지만, 역시 에리얼은 이번 생각거리를 무시해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바닷바람처럼 조용하고 가벼우며 시원했지만, 쉽게 잊히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에리얼은 마법의 책을 그 자리에 두고서 자신이 왔던 굴로 되돌아갔다. 굴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아래언덕에서 나와 헤엄을 치는 동안에도, 조금씩 밝아지는 바닷속을 보고 새벽이 왔음을 직감하고 왕국으로 돌아가면서도 에리얼의 마음속에서는 생각이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책을 읽고 피어난 첫 생각의 뒤를 이어,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주제의 생각들이었다. 해가 뜨기 전에 왕국에 있는 자신의 성의 다락방으로 몰래 들어온 이후에도 에리얼은 안정되면서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모든 것이 뒤바뀐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좋은 책을 읽거나 연극을 본 다음 느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몽환적인 인상과도 같았다. 그녀는 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후 에리얼은 다시 마녀의 신전 도서관이나 아래언덕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조용하고 공허한 바다를 가끔 누비기도 했지만 자신이 다녀온 곳으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새롭게 배운 마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야기를 넘나드는 일, 그리고 그것의 부작용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의 힘.


에리얼은 자신은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사색에 잠겼다. 부정적인 감정 없이, 자신이 거짓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고 갈망하는 것을 잠깐이나마 불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세계로 갈 수 있는 힘을 그녀는 얻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힘은 조심스럽게 써야 할 터였다. 여름 나날 에리얼은 자신의 성 꼭대기에 있는 방에서 동화책들을 살펴보았다. 뛰어난 이야기들, 에리얼의 마음을 울리고 그녀의 생각을 떠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할 차례였다.


그날처럼 환한 달과 은하수가 하늘에 뜬 어느 밤, 에리얼은 잠을 자지도, 몰래 왕국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녀는 먹물 잉크와 연필, 바다 종이를 꺼내든 다음 그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야기였다. 에리얼 자신이 읽고 싶고, 쓰고 싶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자신만의 이야기였다. 달빛과 별빛을 받으며 써내려가는 이야기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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