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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영 Oct 07. 2023

김치

노오랑눈, 까만얼굴, 삼각귀

  유미는 동생에게 조만간 집에 한 번 가겠다고 말한 뒤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 놓는다. 그녀도 휴대폰을 따라 그대로 머리를 침대에 떨어뜨리며 눈을 감는다.  ‘그놈의 김치는....’  냉장고엔 이집저집에서 수거된 각종 김치들이 한가득인데 유미의 엄마는 동생 유정을 통해서 또 김치 가져가라고 성화다.  엄마는 유미에게 할 얘기가 있을 땐 꼭 동생 유정이를 통해서 전화를 걸게 하고는 얘기를 전하게 한다.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유미는 언니로 유정은 동생으로 길러졌다. 그녀들의 엄마는 두 번의 유산을 겪은 후 어렵게 쌍둥이를 낳았다. 유미유정. 자매의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사자성어처럼 붙어 다녔다.

유미는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에 집착하며 가쁜 숨을 쉰다. 내쉬는 숨과 함께 또 벨소리가 난다. ‘저 소리 바꿔야 되는데. 지겨워.’ 유미는 귀찮은 손동작으로 휴대폰을 건드려 힐끗 발신자를 본다. 아빠다.  엄마가 딸이 보고싶어 울었다며 하소연 아니, 따진다.  자식이 정말 너무해 라며 소심한 삿대질을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있는데 나오질 않았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유미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나한테 정말 왜들 이러지! 후끈한 그 진동은 팔과 어깨를 타고 목구멍을 지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통해 뜨거운 한 김을 내 쉰 뒤, 다시 콧구멍으로 흡입되어 그녀의 눈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미는 그 열기가 지나온 모든 곳에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 불쾌하다.   그녀는 휴대폰과 등을 지고 옆으로 누워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아 보았다. 두 눈과 눈썹 사이 깊은 곳에서 통증이 점점 더 세게 올라오며 뜨거워지자, 유미는 엄지를 뺀 네 개의 손가락들을 안구 뼈 사이로 지그시 꾸욱 집어넣는다.

  쉰내 나는 김치, 풀 죽은 유정이 목소리, 성난 아빠의 일그러진 얼굴, 울화통 터치는 엄마의 훌쩍거림 그리고 오래된 벨소리가 유미의 마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유미는 두통이 너무 심할 땐 눈을 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의 자리는 항상 눈과 눈썹 사이였다.  평화로운 그녀의 일상을 깨트리고 자신에게 이 지겨운 두통을 가져가준 원인이 엄마라고 생각되자,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엄마가 너 때문에 울었어!라는 아빠의 말이 자꾸 재생되면서 두통의 불길은 점점 더 세지고 있었다. 유미의 손은 무송곳처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치 많은데 왜 자꾸 가져가라고 유정이한테 그러냐고 따져 묻는 그녀에게 엄마는 선수 치듯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끌어낸다. 지금은 동네 이모들과 드라이브 중이고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고 있으며 얼마 전 고모가 다녀갔었고 아직도 밥 한 끼 안 차려 먹는 아빠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엄마는 여러 날, 수십년에 걸쳐 일어난 짤막한 일상들을 마치 조금 전 한꺼번에 겪은 비극처럼 재구성한다. 유미는 엄마와 함께 드라이브 중인 방청객들이 그놈의 밥은, 고모는 귀찮게 왜 왔어, 으이구, 어머 어머, 세상에나 하며 추임새를 넣는 소리가 들리자 짜증이 한 층 더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유미아빠는 왜 그러냐며 깔깔대는 아줌마들의 비웃는 얼굴들을 지우개툴로 삭제하는 상상을 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미는 밥상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면 유미유정은 아빠의 뒷모습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엄마의 발소리를 기다렸었다.  아빠는 배가 고프면 화를 참지 못한다. 평소보다 늦은 퇴근에 엄마가 뛰어 들어오듯 현관문을 열고 부엌으로 직진해도 그는  엄마에게 왔냐는 말 한마디 않고 일어서.두손을 허리춤에 대고 TV만 쳐다보며 식식댄다.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유미유정이 배고팠지? 미안, 밥 먹자. 자기도 얼른 와서 먹어라는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쌍둥이 아빠는 방금 도착한 밥상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서는 힘껏 엎어 내리쳤다.  유미유정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아직 울진 않는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들의 스토리는 다음 날 쌍둥이 엄마의 늦은 귀가와 음주로 전개되어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내가 놀아? 라며 술 취한 여자의 단골 멘트로 이어졌고, 이에 성난 남자의 배고픔은 무기가 되어 피 터지는 전쟁이 시작되곤 했었다. 그때마다 유미는 본능적으로 동생을 감싸 안아 귀를 막고 눈을 가렸었다. 유정은 세상에서 가장 뾰족하고 가냘픈 소리로 울었고, 유미는 하지 마!라고 수 없이 외쳐보았지만 전쟁 중인 두 사람은 서로를 상처 내는 데에만 집중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쌍둥이 아빠는 여전히 라면 하나 안 끓이고, 유미는 여전히 그날들을 잊지 않는다. 천장 스크린에 옛 기억이 추가로 상영되면서 유미는 더 이상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어졌다.  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유미의 엄마는  주변사람들 눈치를 보며 에둘러 말하곤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직 할 말을 다 못 해 화가 난 상태인 유미는 핸드폰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또 걸었다. 받지 않는다. 그녀는 뜨겁고도 거친 숨을 내 쉬었다. 그렇게 나온 숨이 잘 들이쉬어지지가 않았다. 유미는 뜨겁게 달궈진 숟가락으로 양쪽 눈두덩이를 누르는 듯한 열기와 통증을 느꼈다. 다행히 눈물은 그녀의 마음속으로부터 강제 소환되어 유미를 안아주듯 눈알을 감쌌다. 눈물이 생기니 빡빡해진 눈이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유미의 안구를 휘감아 두통과 열을 흡수한 눈물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눈꼬리로 빠져나와서는 관자놀이를 지나 귓가에 고인다. 아주 조금만 열어놓은 침실 창문의 암막커튼 아래로 오후 태양에 데워진 미지근한 바람이 짧게 불었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유미의 마음은 조금 진정하고 실눈을 떠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 햇빛이 방안으로 가늘게 들어와 핸드폰 액정을 비추니 검은색 바탕의 오래된 얼룩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유미는 귓가에 고여 있던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핸드폰 액정에 톡톡 묻힌 후 이불에 문질러 닦아 본다.  꼬르륵 소리와 함께 형석의 전화다.  


유미야, 모 사갈까? 지금 여기 시장이야

아저씨네 돈가스.

응. 좋아.


  유미의 남편 형석은 가구를 만드는 목수이다.  그의 공방 근처 재래시장에는 만원에 여섯 장을 주는 돈가스 가게가 있다. 주문하면 바로 앞에서 튀겨주는 포장전문점. 형석은 돈가스가 눅눅해지지 않도록 봉투 입구를 조금 열어 헬멧박스에 잘 넣고 집으로 출발한다. ‘지금 먹어야 맛있는데’ 그는 돈가스 튀김의 고소한 향기에 하나 먼저 집어먹을까 하다가 참고 이내 집으로 향한다. 유미는 돈가스를 떠올리자 배가 고파졌다. 형석이 도착하려면 삼사십 분은 더 남았기에 곁들여 먹을 양배추를 다듬기 시작했다. 두통은 양배추를 한통 써는데 집중하면서 잘려 나갔다.

  유미와 형석은 중학교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유미는 엄마아빠의 싸움을 조금이라도 안 볼 구실이 필요했었고 형석은 친구의 전도로 나오게 되었었다. 유정은 언니를 따라 한 두 번 다니다가 주일마다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다며 흥미를 잃었다. 둘은 서로에 대해 특별한 관심 없이 고등학생이 되었고 입시 때문에 교회출입에 뜸해지면서 서로를 잊게 되었었다. 그 후론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20대의 마지막 해에, 유미는 유정과 똑같은 쌍둥이 도마를 주문하려고 검색하다가 지금의 공방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어 달라진 서로의 외모가 어색했는지 유치한 농담을 건네는 것을 시작으로 부부가 되었다.  

  달라진 건 유미와 형석뿐이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들도 구별이 힘든 일란성쌍둥이 유미유정은 그 누구도 쌍둥이일 거라곤 생각 못할 정도로 달라졌다. 동생 유정은 언니보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에 없던 쌍꺼풀이 생겼다. 유미는 큰 키에 통통한 살집 가느다란 눈매다. 주변에서 유미는 엄마, 동생 유정은 아빠를 닮아간다고들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유미는 미간을 구겼다.

  부르릉.  유미는 단층집 현관문을 활짝 열어본다.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던 탓인지 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에도 눈이 시렸다.  형석은 헬멧도 안 벗고 배민처럼 유미에게 돈가스를 급히 건넨다. 유미는 두 손으로 넘겨받아 봉투 안으로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습기가 차서 봉투가 좀 젖었지만 아직 뜨끈뜨끈했다. 유미는 돈가스를 에어플라이어에 넣고 타이머를 돌린 후, 얇게 썰어 씻어놓은 양배추를 접시에 담는다. 그 사이 형석은 헬멧을 벗고 신발장을 열어 고양이 사료를 한 바가지 퍼 마당에 놓인 빈 그릇에 급하게 부었다. 유미는 양배추에 케요네즈를 짜면서 주방 작은 창 너머로 형석을 본다. 형석과 사료그릇을 사이에 두고 주방에 있는 유미와 차밑 바퀴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두 개의 노란빛이 마주쳤다. 유미는 자세히 보려고 창문을 열었다. 차바퀴에 그림자처럼 검은 형체의 길냥이가 유미와 사료그릇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형석이 집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나자 차 밑에 검은 형체는 밥그릇으로 다가온다. 단번에 오지 못하고 좌우와 뒤를 살핀 뒤, 주방에 있는 유미를 주시한다. 유미는 안 보는 척 고개를 숙인 후 힐끔힐끔 길냥이를 쳐다본다.  볼 때마다 밥그릇에 성큼성큼 다가와 있다.  ‘이제 안 볼 테니까 편하게 많이 먹어라.’

  유미는 동물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어릴 적 키우던 셰퍼드를 아빠가 공기총으로 쐈는데, 빗맞았는지 한 번에 죽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이리저리 낑낑대면서 돌아다니다가 아빠에게 다시 끌려갈 때의 그 눈빛을 유미는 잊지 못한다. 쌍둥이자매는 쭈그리고 앉아 귀를 막고 서럽게 울었었다. 그 이후로 유미는 개건 고양이건 가까이하지 않는다.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셰퍼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며 엄마가 자매를 달랬었지만, 유미는 어른들이 보신탕을 먹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라 확신했었다.  부서진 살림살이와 엎어진 밥상, 아빠의 찢어진 러닝셔츠와 멍든 엄마의 얼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끌려간 셰퍼드. 유미는 까만 길냥이를 보며 갑자기 떠오른 기억들로 심장이 두근두근해지자 머리를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땡.


  형석은 샤워를 하고 수건을 목에 건 채 에어플라이어에서 돈가스를 꺼낸다. 직접 만든 엔드그레인 나무도마 위에 먹기 좋게 썰어 플레이팅을 하고 즉석밥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밥이 되는 동안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돈가스를 손으로 하나씩 집어 먹는다.

  형석은 돈가스를 입에 한가득 넣고 씹다가 불쑥 일어나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재빠르게 꺼낸다. 유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식탁에 놓았고 이어서 형석이 캔을 따 맥주를 따랐다. 맥주 거품이 넘칠 듯 말 듯할 때 전자레인지 알림음이 울렸다. 유미가 돈가스를 씹으며 건배를 위해 컵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저 벨소리 바꿔야 하는데... ’ 엄마다.  유미는 지금 막 입속에 넣은 바삭한 돈가스의 튀김가루가 모래알 같다고 느껴졌다.  고소한 튀김냄새도 사라졌다. 형석은 조용히 즉석밥을 식탁에 놓는다. 유미는 숨을 내쉬고,  맥주 한 모금 벌컥 마셔 입안을 헹구고는 전화기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형석은 유미의 잔에 홀로 짠! 하고는 주욱 들이킨 후, 두 잔을 다시 채운다. 그냥 먼저 먹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김치 안 먹는다고! 하는 소리가 났다.  유미가 방에서 나왔다.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식탁 의자에 다시 앉은 유미는 형석에게 건배제의를 한다. 짠?

  유미의 얼굴색을 살피는 형석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장모님은 왜 유미 밥도 못 먹게 하냐는 너스레를 떨며 그녀의 잔에 맥주를 채워준다. 술을 먹는다고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기분은 좀 바뀌는 듯했다.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술을 먹었을까 하고 잠깐 상념에 잠긴다.  갑자기 형석은 냉동고를 뒤적거려 매콤한 불닭발 한 덩이를 꺼내 데운다.  집안에 연기가 자욱해졌다. 토치로 불맛을 내 순식간에 닭발 한 접시를 유미 앞에 내밀어 준다.  박수 세 번.  유미는 매운맛에 입맛이 다시 돌았다.  그리고 형석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안돼. 니가 하면 하루종일 걸리잖아.


  유미는 형석이 설거지하는 동안 꽉 찬 불닭발 연기를 빼려 현관문을 열었다.  무언가 후다닥 소리를 내곤 사라졌다.  유미는 천천히 몸을 숙여 차 밑의 검은 형체를 확인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김... 치야. 이리 와. 안 볼 테니까 밥 먹어” 라며 김치라고 부르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놀란다.  까만김치.  이름을 지어주면 사라져 버리는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는 곧 후회했다.

   김치는 대답이라도 하듯 처음으로 가냘픈 피리소리를 냈다. 유미는 사료를 더 부어주고 물그릇을 헹궈 깨끗한 물로 채워 놓고는 현관문을 조용히 닫아주었다.  매일 사료만 먹는 게 갑자기 마음에 걸린 그녀는 잠자리에 누워 고양이 간식을 검색하다가 문득 집에서 엄마 아빠 푸념을 듣고 있을 유정이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런저런 유튜브영상을 보다가 그녀는 잠이 들었다.



버터냄새가 너무 좋았다.  따뜻한 밥에 간장과 계란프라이를 넣고 비빈 밥이다.  아빠가 만들어준 계란밥은 먹고 있어도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다. 그런데 갑자기 유정이가 소리를 지르며 운다.  계란에 피가 묻어 있다며 씹다 만 밥알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서럽게 운다.  헛구역질을 하며 점 점 더 크게 운다.  유정이 때문에 나도 밥맛이 떨어졌다.  고소한 버터와 간장의 냄새도 사라졌다.  유정이가 거의 실신하듯이 울어댄다.  아빠는 TV속에 있다.  그 안에서 울지 마! 그냥 먹어! 하며 무섭게 소리 지르고 있다.  우는 유정이를 보니 너무 슬펐다. 나는 어떻게든 달래고 싶었다.  뱉어 유정아 뱉어!




  유정아, 유정아!  유미는 잠을 깨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유정이를 불렀다.  암막커튼 때문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꿈속에서 가슴 아프게 슬펐던 기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유미는 유정이가 울면 무조건 가슴이 아팠고 그 아픔은 그녀의 다른 아픔들을 소환한다.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하나 생각하며 한숨지었다.  

  어제 엄마 아빠와의 통화내용들이 머릿속에 맴돌며 차갑게 쏘아붙이고 화를 냈던 자기 자신이 미웠다.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전화를 할까 하다가도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부모에게 도대체 왜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 거지 하며 또 화가 일어난다.  유미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생각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아침은 그녀에게 새로운 오늘의 시작이 아닌, 어제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에 만난 김치가 떠올랐다.   아침마다 형석이 사료를 주고 가지만 새들이 휩쓸고 가면 그릇이 비어있곤 했던 게 생각났다.  유미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물까치 가족이 괴성을 지르며 밥그릇을 엎어버리고 날아갔다.   그녀는 비어있는 그릇이 운명인 듯 재빨리 사료를 부었다.  깨끗한 물도 새로 떠놓았다.  김치는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유미도 의식한 듯 멀찌감치 물러나 기다려본다.  몸을 최대한 작게 움츠리고  앉아 숨만 쉬며 가만히 있어본다.  한참을.  유미는 마음이 조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주 미약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비릿한 사료냄새와 쑥향기가 섞여 스쳐갔다.  몸의 무게에 눌려 발바닥이 저려왔지만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꺼풀에 힘이 빠지니 깜빡이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다.  까만 모자에 하늘색 날개를 가진 회색새들은 땅에 흐트러진 사료를 보고 자기들끼리 소리를 내며 회의를 하는 듯하다.  유미가 거리를 두고 비켜주긴 했지만 선뜻 먹이를 향해 달려들진 않는다.  물까치들이 갑자기 더 수다스럽고 높은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노오랑 눈의 까만 얼굴 삼각형 귀를 가진 얼굴 반쪽이 유미를 본다.   그녀는 설레었지만 표현하진 못했다.  움직이면 그나마 다가오던 김치가 사라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동물병원 의사의 유튜브가 떠올라 실험해본다.  유미는 김치의 한쪽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떴다. 이 행동을 반복하면서 마음속으로 얘기해 보았다.  ‘이리 와. 니가 좋아. ’

  김치는 얼굴을 조금 더 내밀더니 마치 졸음이라도 온 듯 얇고 가는 눈모양을 만들었다.  관심 없다는 듯 먼산을 한번 쳐다보고는 유미의 행동을 계속 지켜본다.  유미도 따라 해 본다.  둘은 긴장 풀린 눈으로 서로를 꿈뻑꿈뻑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김치는 성큼성큼 밥그릇 앞으로 다가가 한번 더 유미를 쳐다본다.  마지막 관문이라고 느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했다.  이제 밥 먹겠지 하며 마음속으로 흐뭇해하고 있던 유미는 갑자기 네발을 하늘로 보내며 ‘벌러덩’ 땅에 누워버리는 김치 때문에 앉은 자세의 중심을 잃고 살짝 엉덩방아를 찧었다.  낯선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툭, 치는 듯했다.  사료를 먹으로 온 길고양이가 자기 앞에 누워 이리저리 뒹구는 모습에 유미는 무언가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마음속에서는 물까치들보다도 시끄럽고 높은 환호의 소리가 들려왔다.   수없이 많은 삶의 질문에 막혀있던 그녀의 숨이 갑자기 펑 뚫린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마음이 들뜨고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목에서 뛰고 있는 듯 숨 쉬는 것이 쉽고 가벼웠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김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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