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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영 Dec 07. 2023

시간의 공간

남양주 공사현장에 10시 약속이다. 오전루틴을 서둘러본다. 샤워 후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햇빛이 드는 창가 스툴에 앉아 디자이너가 보내온 카톡사진을 확인했다. 사진으로 미리 본 현장은 층고(높이)가 4미터 정도 되는 축사 같은 지붕형태로 깊숙한 직사각형의 모양이다. 바닥은 내가 벽 작업을 끝내고 나면 타일을 시공한다고 한다. 멀찍한 정면과 그 양 옆 디귿자형 벽이 내가 다음 주부터 작업할 면적이다. 약 40제곱미터(헤배) 정도 된다고 들었다. 가로 1미터 x 세로 1미터의 정사각형이 약 40개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진 속 작업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벽체 여기저기에 목공 타카 작업을 하고 있다. 한 명은 노란색 목공장비 테이블에서 판재를 자르고 있다. 시멘트 벽돌의 창고건물을 목재와 단열재, 석고보드로 덮고 있는 목공작업이다. 전기공사 전이라 침침한 현장사진에서 유난히 하얀 창문 샤시는 막 새로 교체한 듯하다. 긴 나무 목재들과 포대, 장비들이 여기저기 바닥에 놓여있고 큰 사다리와 비계(아시바)가 한쪽에 지키고 서 있다. 네모난 깡통모양 고체연료에서는 희미한 열기가 비친다.


이번 현장의 디자이너는 지인에게 소개받아 처음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전화로 인사하고 카톡으로 정보를 교환한 뒤 진행하기로 확정했다. 휴대폰을 놓고 머리에 감은 수건을 풀며 드라이하러 일어서는데 다시 카톡이 울린다.


‘죄송한데 약속시간을 오후로 미루면 안 될까요?’


순간 멍 했다. 멍하면서 큰 안도감이 들었고, 안도감은 곧 나에게 쫓기지 않는 자유시간을 주었다.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의 좁았던 시간이 오후 2시라는 시간으로 확장되면서 나에게 넓고 충분한 공백을 주었다.


시간이 선물한 공간.

나는 세 다리-스툴에 엉덩이를 걸치고 뒤통수에 햇볕을 쬐었다. 무소음 자연광에 머리카락을 길게 말려본다. 따스한 햇살이 물기로 반죽된 머리카락 덩이들 사이사이로 침투해 두피를 마사지하는 듯하다. 아침부터 꼬리를 바짝 세우고 졸졸 따라다니던 심바가 발꿈치 옆으로 벌러덩 눕는다. 나처럼 안도하는 듯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뜬다. 두피일광욕을 하며 창가에 세워둔 가로 30센티 세로 45센티의 합판 3개를 들어 보았다. 어제저녁 급하게 만들었어도 예쁘고 깔끔한 마감에 질감도 보드랍다. 손톱으로 꾸욱 눌러 강도를 확인했다. 돌처럼 단단해졌다. 하얀 라임(석회)에 대리석가루, 백토, 모래, 실트 등을 물이나 수지(접착제류)에 섞어 반죽한 뒤 트로웰(양고대, 서양고대, 미장칼)이나 스파출러 (퍼티나이프, 헤라)라는 도구로 벽에 바르면 공기와 닿아 건조되면서 점점 더 강도가 세진다. 유럽식 미장 마감법이다.  햇빛에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 보니 대리석가루와 실트들이 반짝인다. 돌멩이를 갈면 모래고, 모래를 더 곱게 간 것이 실트이다. 목수들이 목재와 석고보드, 합판 등으로 벽체를 만들어 놓고, 퍼티전문가가 핸디코트와 각종 조인트 자재들로 벽의 살을 바르고, 말리고, 갈고 해서 평평한 벽을 만들어 준다. 그 후에 나는 페인팅이나 미장으로 벽면을 아름답게 바르며 인테리어를 완성해 나간다.  색칠과 미장, 나의 직업이다.


지금 여기, 나는 약속변경으로 생긴 시간의 공간에서 아주 고요하고 평안한 공백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약속을 변경한 상대방은 나에게 너무 미안해하며 시간에 쫓기고 있을 것이다. 인테리어 현장을 진두지휘하면서도 딸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에 나란 사람과 초면에 약속까지 미뤄야 하는 그녀의 ‘지금’ 은 공백 없는 만원 버스 같지 않을까 싶다. 가긴 가야 해서 탄, 너무 답답하고 불편해서 빨리 내리고 싶은데 멈추지 않는 버스. 그런 맘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카톡에 계속 미안한 마음을 보내온다. 나는 ‘괜찮아요’ 대신 ‘마침 저도 허리가 아파 좀 쉬고 싶었는데 잘 됐어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온전히 나의 책임이 아닌 상황이 될 때 마음도 한 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가 불안한 마음으로 뛰어다니지 않고 병원에 잘 다녀왔으면 좋겠다.


한국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주로 실장이란 직책으로 영업, 고객상담, 디자인, 도면, 소재 고르기, 업체선정, 현장관리 그리고 결재를 잘 받는 것까지 모두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 더 AS까지. 대부분 1~2인 소규모 업체들이고, 대형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후 독립해서 작게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좋은(돈 많은) 고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도 좋은 차(외제차)를 뽑고, 월세 사무실에 빚을 내 공사해서 멋진 쇼룸으로 쓰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차량 할부금, 월세를 내고 품위유지를 한 뒤 업체들 결재를 한다. 잘 나가다가도 공사에 문제라도 한 번 생기면 영세한 실장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나도 그런 인테리어업체와 일해서 10년째 받지 못하는 돈이 조금(꽤) 있다. 이제는 연락도 안 되고, 언젠가 어디서라도 만나게 된다면 마음을 졸이며 숨을 사람은 내가 아니니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주로 공사 후 돈을 잘 안 주려고 하는 업체들의 패턴을 보면 겹치는 지점들이 있다. 나의 경험에서 온 주관적인 징후들이지만 이런 통찰은 처음 대하는 업체들을 판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첫 번째로 다짜고짜 ‘헤배당 얼마냐?’라고 물어보는 자, 두 번째로 ‘일정이 꼬여가지고 그러는데 내일 당장 시작할 수 있냐?’, 세 번째는 ‘다른 팀이 하자를 내고 도망갔다. 이번만 싸게 도와주면 다음에 큰 공사 주겠다’라는 식의 업체는 지인소개 외엔 일단 보류다.  나도 초보시절엔 사정을 다 들어주며 상대에게 흠뻑 공감되어 진흙탕으로 같이 빠져 들어간 적이 꽤 있었다. 자기 우월감과 욕심, 눈앞의 돈과 스토리에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어떤 자재로, 어떤 디자인, 시공기간은 어느 정도 잡으면 되겠냐, 스케줄은 어떠냐, 멤버들 경력은 어떠냐, 예산은 얼마냐... 등의 대화가 정상적인 대화이다. 원하는 디자인을 서로 주고받고, 샘플을 만들고, 가격과 공사기간을 협의하고 계약금을 내고 진행하는 회사가 비교적 깔끔하다.


내가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시간이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비단 나의 작업뿐 아니라 건축 관련 모든 공정은 거의 시간이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력도 시간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시간은 돈과 같다. 시간과 돈이 만든 완성도 있는 공간은 또다시 돈과 시간을 벌어다 주기도 한다. 완성해 간다는 것은 사실 끝이 없다. 해도 해도 모자란 것 같고, 살면서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집을 가꾸는 인테리어이다. 적당한 때에 상호 간의 끝을 합의하고 멈출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공사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파트너사들의 내공과 궁합은 필수다.


색칠과 미장은 앞서 진행되는 공정인 목공과 퍼티평활 작업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목구조물이 제대로 시공되지 않으면 퍼티작업자가 고생을 하고, 퍼티작업자가 대충 해 놓으면 거의 최종마감단계인 색칠과 미장작업은 2, 3배의 시간과 비용이 들 수도 있다.(우리나라는 퍼티와 도장, 미장을 모두 다 하는 멀티플레이 고수들이 많다.) 현장에서는 간혹 앞 공정 탓을 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첫째 남동생이 얼마나 속이 탔었는지 올 초에 비싼 돈을 내고 목공아카데미를 수료했다. 차라리 자기가 직접 목공하고 페인팅도 해서 돈도 두 배 벌고 마감도 더 잘 나오게 할 거라며 자신만만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퍼티와 페인팅만 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공정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경험한 것 같다. 대신 부족한 목공작업 보완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업그레이드되어서 마감 퀄리티가 더 좋아진 것 같다. 둘째 남동생도 형과 함께 한 팀으로 페인팅을 한다. 나와 JJ,  남동생들 모두 이 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삼 남매는 JJ에게서 배웠고 JJ는 그의 남동생으로부터 기초 기술을 배웠다. 우연인 듯 인연이다. 현재는 모두 따로 독립해서 각자의 취향대로 일을 하고 있다. 가족이라도 일로는 상대방의 현장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식구로서는 서열이 있지만 현장에서는 평등해져 가고 있다. 물론 그 누구도 JJ를 넘어설 순 없지만 각자의 특기가 생기면서 상호 존중하며 지원할 뿐이다. 거래처와 일하는 디자이너가 다르고 시공의 방법과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 무엇보다 모두 자기 주도적으로 일하며 소비자나 디자이너와 직접 소통하고 싶어 한다. 좋게 말하면 모두 장인기질이 있다. 가끔 나는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현장에서 뭉치곤 하게 한다. 우리들에겐 현장이 무대이다.


가족들과 거친 현장일을 배우면서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속도와 힘적인 면에서 이 체대출신 남자들을 따라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초는 나와 JJ가 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었다. 나 역시 JJ와는 다른 노선으로 나아갔고, 그러한 시간들은 나의 경력을 하나하나 채워주었다. 그렇게 느릿느릿하지만 꾸준하게 나의 작업세계를 가꾸었고 이제 조금씩 꽃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지금의 꽃이 좋다.


나의 꽃은 천천히 피어올라 오래도록 햇빛을 쬘 것이다. 지금처럼. 그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꽃처럼 아름다운 색칠과 미장작업은 나에게 매력적인 향기를 선사하기에 더 이상의 바람은 놓아준다.  내가 알 수 없는 날, 시절인연이 찾아와 꽃은 지겠지만 그것은 열매가 열린다는 기쁜 소식일 뿐.


이 아침,  

선물 같은 공백의 시간이 나의 공간을 이 글로 가꿀 수 있게 해 줌에 감사함을 느끼며

아무 일 없이 고요한 행복을 조금 더 즐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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