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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따뜻한뿌리 Nov 23. 2022

무작정 산골 살이 1편

거꾸로 살아보기 시작

 2003년 4월 초봄이었지.. 

 남편은 산골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재우고 책을 읽거나, 저녁에 반주 한잔 하면서 하는 이야기라 그냥 그런 지나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당시 남편은 목수일을 하고 있었는데, 꽤 경기가 좋을 때라 일이 끊이지도 않고 골라가며 일을 할 정도로 일거리도 많았고, 경제적으로도 괜찮았을 때였다. 하지만 점점 왜 농사를 짓고 산골에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자꾸만 물어왔다. 사실 맞벌이로 아이 셋 키우며, 남편도 출장이 많았고, 셋째를 출산하고도 쉬지도 못하고 육아에 직장 일에 거의 체력적으로 정서적으로 바닥이 날쯤이었다.  둘 다 출장을 가야 할 때도 많았고 정신없이 뛰다시피 하고 살고 있었고, 눈을 마주 보고 편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아득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서로 이야기했다. 이렇게 아이들을 아침마다 배달하듯 유치원과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미친 듯이 돈과 일에 매달려 시간에 쫓겨가며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자신은 더 이상 끌려다니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산골에 가서 먼저 터를 잡아놓겠노라고 했다. 그냥 해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진심이구나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실행에 옮길지는 몰랐기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남편의 고집을 알기에 뭐라고 반박도 못하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막상 가보면 달라질 수도 있고, 농사라는 게 그렇게 쉽지 않은 결정인데 쉽게 정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남편이 떠난 동안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거의 지쳐갈 즈음 연락이 왔다. 그 사이 산골 옹달샘에서 신비의 묘약으로 마셨는지 전화기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맑고 편안한지 기가 막혔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우린 아빠를 찾아 산골로 가기로 했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하필이면 연휴에 한식까지 겹친 때에 휴가를 낸 탓에 도로는 주차장이 되었고, 세 아이들은 처음에는 신나서 환호를 지르더니 지루함에 지쳐 슬슬 싸우고 난리가 났다.  

그렇잖아도 장거리 운전에 미숙한 난 머리와 다리가 후들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중앙고속도로를 지나 구불구불 36번 국도를 지나 급기야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개울까지 건너 무려 6시간 만에 도착했다. 도착한 첫날은 긴장감과 피로감으로 뭘 살펴볼 힘도 없이 잠이 들었다. 

피곤해서인지 아이들도 나도 남편이 준비한 저녁을 먹고 그냥 푹 잔 것 같다. 

다음날 아침, 밖에서는 알지 못하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마루 끝에 서니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어때? 여기 참 좋지? 하는 눈빛이었다. 

근데 난 아직 아무것도 본 게 없는데, 그냥 새소리, 바람소리.. 햇살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고요함 그것뿐이었다.  저만치 산이 보이고 오래 묵힌 마당에 핀 노란 민들레와 아직도 생뚱맞게 꽃이 붙어있는 벚나무와 찔레꽃 향기와 어지러운 잡초들을 둘러보는데 늘 불면증에 시달려 예민함과 까칠함을 얼굴에 적어놓고 다니는 남편의 편안한 얼굴이 보였다. 

일순간 '사는 게 뭐 별거 있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어디서든 못 살까?' '아이들도 시골에 살면 정서적으로 더 좋겠지' '그래 나도 이제 지치네' 뭐 이런 생각들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마당을 쫓아다니며 민들레꽃을 따고, 엄마 강아지를 키우면 좋겠어요, 닭도 키워요, 토끼도요 하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아빠에게 쏟아내고 아빠는 뭐든 다 해줄 수 있다고 벌써 개집과 닭집을 그리고 있었다. 

산골에 살기로 결정을 하고 땅주인에게 연락을 하더니 단숨에 연습장을 푹 찢어 가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살고 있는 집도 내놓자마자 성사가 되고, 막상 집이 팔리니 아이들 학교 문제, 직장문제도 일사천리로 마무리가 되었다. 

도대체 호미 한번 낫 한번 든 적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마치 무언가에 홀리듯 모든 것이 빠르게 운명처럼 지나가버렸다. 가끔은 무식하고 단순한 것이 힘이 되는 법이다. 

 정신 차리고 계약서를 보니 산 아래 우리 땅이 1만 평이라는 걸 이사를 하고 알았으니 말이다. 세상에 여기가 다 우리 땅이네.. 마치 전쟁에서 이긴 점령군처럼 이야기했지만 그 땅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노동과 땀이 필요한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감이 났다.      

                  

헌 집 고치기      

산골살이가 시작되었다. 

막상 고치려고 집에 손을 대니 주인이 임시거주로 지은 집이라 보기와는 다르게 벽도 얇고, 부실하고 고칠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니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남편은 전직 목수였다. 난 당연히 집을 부수고 다시 짓기를 원했다. 

고칠 수 있는데 왜 집을 지어? 하고 내게 물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아니라도 아이 셋과 내가 편하게 살 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보통 시골에 오면 꿈꾸던 전원주택의 꿈이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집을 부수면 이건 다 어쩌고? 엄청난 폐기물은 물론이고 우린 돈도 아껴야 해. 이젠 예전처럼 월급도 안 나오잖아" 산더미 같은 폐기물과 돈을 아껴야 된다는 말에 새집의 꿈이 산산이 무너졌다. 

생각보다 산골생활도 농사도 처음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월급을 받지 않는 생활이라는 게 처음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가을이 아직 오기도 전인데 산골 날씨는 아침저녁으로 차갑고 서늘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데 신기하게 차가움이 따갑지 않고 맑고 청량했다. 

곧 다가올 겨울은 어떨지 남편은 밤마다 숙제를 하듯 연습장에 해야 할 일들과 겨울을 대비할 준비를 빼곡하게 적고 있었다.  

집은 단열재로 보강하고, 나무로 덧대어 제법 안에서는 목조주택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부엌은 식구들 모두가 가장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고 식탁은 길고 넓게 나무로 만들었다. 

기름보일러는 뜯어내고 거실에 난로 겸 화목보일러를 만들었다. 안에서 불도 볼 수 있고 집안에 난로 겸 보일러를 설계해서 제작을 맡겼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일러가 탄생한 셈이다. 

이때 만든 보일러는 몇 번의 진화를 거듭해서 아직까지도 기본 틀은 사용하고 있다. 

11월 아직 땅도 얼지 않았는데도 산골 추위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추웠다. 

이웃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니 여긴 영하 15도가 예사라고 각오하라는 듯이 이야기해주었다. 

남편은 집안에 침대처럼 큰 구들을 놓자고 했다. 우리 집 산 쪽에  황토흙을 봐 둔 게 있다고 했다. 

책에서 보던 구들을 만들자고 하니 거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을 뿐이다. 

마을 비워둔 폐가에서 구들을 파서 가져와 구들을 놓고, 일일이 삽질로 황토를 담아 옮겨 와서 황토를 얹고 마무리는 황토를 곱게 체에 쳐서 밀가루 반죽처럼 만들어 미장을 했다.  

불을 때면서 서서히 말리면서 다져야  갈라지고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저 남자는 언제 혼자 저런 생각들을 모으고 계획했을까? 마치 모든 일이 백만 년 전부터 머릿속으로 계획을 한 사람처럼 느긋하지만 꼼꼼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도시에서만 살아온 난 모든 것이 낯설었고 거저 신기할 뿐이었다.      

황토물로 미장을 한 구들을 단단하게 디디기 위해 우리는 저녁마다 음악을 틀어놓고 댄스파티를 벌렸다. 당연 아이들은 신나서 오예! 를 외치며 들떠서 난리법석이었다.  

몰랑몰랑한 황토 위에서 펄쩍펄쩍 뛸 때마다  쫀득쫀득한 발바닥의 느낌은 신나고 즐거웠다. 땀이 나도록 춤을 추고 나면 발바닥이 황토로 누렇게 물이 들어 서로의 발바닥을 보면 웃음이 터졌다.  

산골은 이렇게 우리 가족을 이곳에서 살아내라고 품어주었다. 

우리가 발 딛는 대로, 우리가 춤추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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