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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따뜻한뿌리 Nov 28. 2022

무작정 산골 살이 3편

산나물 실미도(?) 경험

 

겨울..., 그리고 봄 

농사를 짓겠다고 산골에 왔는데 산 아래 일 만평은 예상 그 이상으로 농사짓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같이 풀 한번 제대로 못 뽑아본 신출내기에게는 가혹한 땅이었다. 급한 경사에 돌투성이에 묵힌 밭이라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난감했다. 남편과 나는 일단 우리 땅 탐색에 들어갔다. 동네 분들을 만나 의논도 했다. 다행히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 땅에 대해서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올라가다 왼쪽 밭에는 고추를 심어 거기가 그래도 해가 좋아, 밤나무 밭쪽은 그늘이 지니까 나물을 심고, 두릅과 개두릅나무는 많으니까 잘 다듬어 봐 그 밭에 오가피도 많고 그 위쪽으로는 잔대도 많아. 소나무 뒤에 땅은 고구마를 심어도 될 거야... 가뭄이 안타는 밭이니까...” 그렇게 우리 땅에 대한 정보를 더듬더듬 짚어나가는 중 알아낸 특급정보가 있었다. 봄이면 산나물 고수인 동네 언니들이 산에 가서 산나물 채취를 한다고 하였다. 

그즈음 산에 대한 호기심으로 답답하던 차에 산나물꾼들을 따라다니면 책으로만 보던 산나물과 약초들을 직접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꼭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연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우리가 가는 산은 등산하러 가는 산이 아니데이... 비탈길에 막 기 올라가야 하고 얼마나 힘든데.. 차령이 엄마가 따라 가 내겠나?” 했다. 난 사실 도시에 살 때도 제대로 된 등산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호기였는지 “나 산 잘 타요.. 내가 이래 봬도 산 타는 것 자신 있어요” 했더니 떨떠름하게 여기며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여기는 산나물도 다른 곳 보다 늦게 나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춰가야 한다고 했다. 

연락을 기다리는 차에 전화가 왔다. “데꼬는 가는데 애믹이면 다시는 안 데려간다. 내일 새벽 6시에 집 앞다리에서 기다려 밥 사 갖고 오너라” 나는 들떠서 정성껏 도시락을 챙기고 등산 가방도 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간에 맞춰 다리 앞으로 내려갔다. 벌써 트럭이 집 앞다리에서 산행 가는 동네 언니들이자 나물 선배님들 5명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니 나를 아래위로 쭉 훓더보더니 “니 이래 올 줄 알았다” 하고 서로 쳐다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나물 하러 갈 때는 이래 가면 안 된다. 일단 큰 보자기를 꺼내더니 내게 스님들 옷처럼 아래 위로 묶어주었다. 묶고 나니 몸에 큰 보자기 가방이 장착되었다. 막상 보자기를 매고 나니 두 손이 자유롭고 가볍게 느켜졌다. “이래야 나물을 많이 해오지 배낭은 뒤로 메고, 도시락은 이기 뭐꼬? 산에 올라갈 때는 최대한 무게를 줄여야지 나중에 떨거덕거리고 얼마나 귀찮은 줄 아나?” “오늘은 일단 가자! 가보면 알 거다”트럭 안에 두 사람이 타고 나머지 사람은 짐칸에 올라탔다. 차가 갈 수 있는 곳 까지는 차로 가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덜컹 거리는 트럭 짐칸에 올라탔더니 무섭기도 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혹시나 누가 알아챌까 얼굴은 웃고 트럭 난간을 꽉 잡은 손에는 땀이 났다. 그렇게 봄 산나물  첫 산행이 시작되었다. 아직 이슬을 잔뜩 머물고 있는 풀숲을 익숙한 듯 헤치고 올라갔다. “니 단디 따라오너라, 우리 놓치면 집에 찾아오겠나? 우리도 저 언니 아니면 헷갈린다”라고 1차 경고가 날아왔다. 산나물은 높은 산에서 따야지 부들부들하고 좋은 거라고 하며, 한 시간 넘게 경사진 산을 기어 올라갔다. 꽤 산을 올라갔을 때쯤 “봐라 여기 산나물들 보이제?  요거는 취나물이고 요건 곤드 레고 어수리, 곰취도 있네... 잔대도 있네... 잔대나 둥굴레나 더덕은 아주 큰 거 아님 캐지 마라 산나물에 흙 묻고 그거 캐다보면 우리 놓친다. 잔대 싹은 꼭 뜯어, 진짜 맛있다" 언니들은 산나물이 보이는 대로 뜯어서 나물 보자기에 넣고 있었다. 사실 난 취나물이다 곤드레다 뭐다 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뭐가 뭔지 구분이 잘 안 갔다. 먼저 쉬운 취나물부터 배우려고 해도 어리거나 그늘이 지면 또 헷갈렸다. 난 딸 때마다 ”이것 맞나요? “ 하고 확인을 했다. ”그래 봄나물은 어지간하면 먹어도 안 죽는다 일단 따 봐라 “ 나물 따느라 바빠 죽겠는데 계속되는 질문에 귀찮은 내색이 묻어있었다.  경사가 심한 곳을 기다시피 올라온 터라 다리는 후덜 거리고 힘이 부치니 기도 죽어서 언니들 손끝만 쳐다보고 겨우겨우 비슷한 나물들을 찾아내려고 두리번거렸다. 위를 쳐다봐도 아래를 봐도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산에 가면 대장 나물꾼이 목을 살짝 뒤로 젖히며 ‘후우’라고 길게 소리 지른다. 그럼 함께 간 이들도 ‘후우’하고 대답을 해준다. 같이 간 사람들에게 ‘나 여기 있어’라고 하는 신호도 되지만, 산짐승들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니 서로 맞닥뜨리지 말자는 신호이기도 하다. 산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일종의 금기라고 한다. 이름을 부르면 이름 부른 사람을 산이 데리고 간다는 좀 황당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약간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속으로 ‘후우 후우’하고 속으로 되뇌고 되뇌었다.       

한참 나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보니 점심때가 되었다. 이제 드디어 쉬는구나... 밥 먹자 소리가 얼마나 반가운지... 나만 도시락에 담아왔고 다른 사람들은 비닐봉지에 고추장이나 된장을 한 숟가락 퍼서 왔다. 비닐을 흔드니 밥과 된장이 섞였다. 좀 전에 딴 곰취에 쌈을 싸서 먹어보라고 했다. 바로 딴 곰취와 나물들을 툭툭 털어 먹어보니 쌉사릅한 진한 향과 달큼함이 입안에 확 퍼졌다. 거기에다 된장에 비벼진 짭조름한 밥이 올라가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맛있게 먹어본 쌈밥이었다. 아직도 그날 그때 먹어본 산나물 쌈밥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가지고 간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도 맛나게 먹었다고 칭찬을 들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산나물 채취에 들어갔다. 나물꾼들 손은 점점 더 바빠지고, 연신 산나물 보따리로 나물들이 들어갔다. 너무 빨라 정신이 없었다. 거저 놀라울 뿐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산나물을 뜯다가 뿌리까지 뽑힌 게 있으면 잎은 따고 뿌리는 제자리에 꼭꼭 심어주었다. 그래야 내년에 또 뜯을 수 있으니까...

난 하나씩 딸 때마다 확인을 하고 넣고를 반복했다. 점심을 양껏 먹고 나서인지 몸은 무거워졌고 거기다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니 ‘아 바로 내려갈 수 있겠다’ 싶어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근데 웬걸 이 정도 비에는 끄떡도 없다는 듯 하늘만 한번 휙 쳐다보고는 산나물 채취에 전념했다. 알고 보니 이렇게 높은 산을 힘들게 왔고 나물들이 많으니 비가 와도 쉽게 내려갈 수 없었던 거였다. 나물꾼들 나물 보자기는 만삭 된 임산부처럼 불러오고 나는 내가 왜 여기를 따라왔나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힘들어서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비가 오니 겨우내 떨어진 솔잎에 산길은 미끄러웠고, 추웠고, 등에 맨 가방에는 보온병과 도시락이 연신 떨거덩거리고, 나물이고 뭐고 사람들을 놓치면 집에도 갈 수 없으니 죽자 사자 붙어서 따라다녔다. 그래도 뒤에 쳐진 나를 한 번씩 불러주었다. ”잘 따라오고 있제? “ 비 온다고 집에 가자고 했다가는 다음에 데리고 오지 않을까 아무 말 못 하고 있는데 눈물이 뚝 떨어졌다. 빗물에 눈물에 그냥 눈물이 났다. 특별히 슬프지도 않고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든 상황도 아닌데 이상하게 서러웠다. 솔솔 뿌려대는 빗줄기가 조금씩 세지자 누군가가 안 되겠다 싶은지 ”길도 미끄럽고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날 또 오자“고 했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나물 보따리에 든 나물을 배낭과 앞에 맨 보따리로 나눠 정리를 하니 앞 볼록 뒤 볼록이 되었다. 저렇게 불룩해진 몸으로 산을 어떻게 내려갈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겨우 한 움큼 딴 내 나물 보따리가 불쌍한지 조금씩 나눠주어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들에게 체면을 세울 정도가 되었다.   

내려가는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지만, 날쌘 다람쥐처럼, 아니 나물 보따리에 밀려 걸어가는지 밀려가는지 내려가고 있었고, 난 기어가는지 누워가는지 모르게 우찌 우찌 트럭이 있는 곳까지 내려왔고 다시 트럭에 실려 집 앞다리까지 왔고 나를 내려놓고 떠났다. 난 이미 영혼은 안드로메다로 떠났고 홑껍데기 육신만 남은 기분이었다. 다리에서 우리 집까지 100m 남짓 오르막인데 그 길이 세상 얼마나 멀게 느켜지는지 걸음을 떼기 힘들 정도였다. 다행히 남편은 비도 오는데 왜 이렇게 안 오나 걱정이 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남편을 보자 서러움이 복 받혀 또 한바탕 눈물을 흘렸다. 비를 맞고 내리막에 미끄러질까 엉덩이로 내려오다시피 해서 만신창이가 된 나를 보더니 “이놈의 여편네들이 남의 이쁜 마누라를 와 이래 놓았니?”하고 헛웃음 반 걱정 반으로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부축하고 올라왔다. 

집에 오자마자 대충 옷을 갈아입고 목욕도 못 하고 푹 쓰러졌다. 나의 첫 산행은 처참하고 당시 개봉된 실미도 영화의 체험을 제대로 하고 온 느낌이었다.      

다음날 전날 해 온 나물 보따리를 펼쳐놓고 복습을 하려고 보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물이라곤 민들레 쑥 밖에 모르는 남편과 나는 그래도 알고는 먹어야지 하며 나물 보따리를 들고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할머니가 우리를 반겼다. “언니는 어딜 갔어요?” “응 산에 갔지” 우린 순간적으로 놀라 마주 보았다. 그 집 마당에는 벌써 산나물이 아궁이 가마솥에서 곱게 삶겨서 싸릿대로 묶은 채반에 가지런하게 늘려있었다. 어제 비도 오고 나 같은 신출내기를 데리고 간지라 봐 둔 산나물을 다시 뜯으러 간 것이다. 할머니는 펼쳐놓은 나물을 하나씩 가르쳐주었다. “봐라 그리 모르겠나? 먹을 수 있는 나물은 뒷면이 반들 반들 하데이 딱 봐도 이쁘잖아...” 이쁜 산나물과 약초를 알기 위해 따라나선 산행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해마다 반복이 되었다. 햇수가 쌓일수록 내 나물 보자기도 볼록해지고 밭에 가기보다는 산을 더 좋아하는 산골 아주머니가 되었다. 멀리 있는 더덕과 잔대도 곧 잘 보고 특히 더덕 캐는 걸 좋아해서 나중에 언니들이 더덕녀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봄이 되면 산에 올라간다. 산에 올라갈 때 나는 가장 역동적이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웃기지만 ‘전생에 심마니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산에 가면 눈이 밝아지고, 힘이 나고 재미가 난다. 산골에 살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 이곳에 살아가는 것은 순간순간 기적을 맞이하는 것만 같다.           


****저희 마을은 국유림 아래 마을로 주민들은 1년에 한 번 산나물 채취 권리를 산림청으로부터 부여받아 산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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