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밥 말고 '절떡'은 초면입니다.

덕이 부족한 게 아니라 떡이 부족했던 거야.

by 고든밍지

멀고 먼 남해 여행을 결정한 이유는 바다가 멋있어서, 독일 마을에 가보고 싶어서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보리암과 금산 때문이었다. 남편이 가장 기대했던 곳은 바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경치였다. 남편은 여행을 앞두고, 거의 매일 저녁 유튜브로 보리암과 금산 영상을 나에게 몇 번씩이나 보여주었다. 이런 계속된 주입식(?) 교육으로 나도 이번 남해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독일 마을도, 다랭이 마을도 아닌 단연코 보리암과 금산이 되어버렸다.


남해 여행 첫날부터 비가 왔다. 보리암에 가기로 한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하며, 우중산행도 불사할 계획으로 우비도 챙겨갔던 터였다. 드디어 금산에 가기로 한 날, 비가 조금 왔지만 다행히 숙소를 나서자 비가 그쳤다. 안개에 싸인 금산 주차장을 찾아 운전이 어려운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비행기를 탄 듯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꽤 높이 올라온 것 같았다.


무사히 차를 대고, 물안개로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르막길을 올랐다. 15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보리암에 도착했다. 영상과 사진으로 보고 기대했던 그 멋진 경치가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잠깐 안개가 걷혀 보일 것 같다가도 보이지 않았고, 잠시 핸드폰을 보고 딴청을 하고 있는 새에 다시 구름에 가려지기를 반복했다.


나보다 더 기대했던 남편은 드문드문 보이는 풍경에 유독 아쉬워하며, 우리가 "덕이 부족한가 봐!"라고 장난 삼아 말했다. '멀리서 왔는데 하필 이런 날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다니.....' 아쉬운 마음을 못내 삼켰다. 남편은 그래도 좋은 기운을 받아 가자며, 올해 우리의 가장 큰 바람인 임신을 소원으로 빌고 가자고 했다. 불상 앞에서 기도를 하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사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마음만은 간절히 두 손 모아 빌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정상을 봐야겠다며 우산을 들고, 정상에 올랐다. 역시나 경치는 잘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웠지만,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라면 맛집으로 유명한 금산 산장에도 들러 물 한 병을 사고, 경치를 다시 둘러보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보리암을 다시 지나쳤다.


절에서 떡을 나눠주고 있었다. 노란 콩시루떡과 진한 보라색의 팥시루떡, 지나가던 우리는 우연히 팥시루떡을 받게 되었다. 선택권은 없었지만, 나는 팥시루떡을 받아 더 좋았다. 우리뿐 아니라 그때쯤 길목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떡을 받았다. 불교 신자가 아니라 자주는 아니지만 여행지나 집 근처 절을 가본 적이 꽤 있었다. 절밥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고기 하나 없는 절밥이 그렇게 맛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절떡이라니! 절떡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실제로 받아본 것도 처음이지만, 절밥도 맛있다는데 절떡은 얼마나 맛있을까 감히 예상할 수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떡에 기분이 좋았다. 사실 그전까지는 정상에 괜히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하얀 기운에 가려 기대한 경치를 보지 못했다. 조금 더 걸어간 정상에서도 역시 볼 수 없어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정상을 안 보고 먼저 내려갔다면 떡을 나눠주는 타이밍과 맞지 않았을 텐데 생각하며, 정상에 올라가길 잘한 이유를 하나라도 찾은 것 같았다.


아직도 따뜻한 떡을 먹어보았다. 알알이 살아있는 팥의 식감이 느껴졌다. 너무 달지는 않았으나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왔다. 떨어지는 팥 부스러기도 아쉬워하며 열심히 주워 먹었다. 사실 그 전날도 유명한 떡집에 가서 떡을 먹었다. 거기서 사온 떡을 오늘 아침에도 등산 간식으로 먹었다. 그러고 나서 또 먹은 떡은 질릴 만도 한데 뭔가 달랐다. 그냥 커피가 아닌 TO*라는 모 커피의 광고 카피처럼, 그건 그냥 떡이 아닌 '절떡'이었다.


어제오늘 먹었던 떡보다 특별히 맛있거나 평소 먹던 시루떡보다 월등한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 뭐가 달랐을까. 내가 떡순이라서? 등산을 마친 뒤라서? 아직 따뜻한 바로 만든 떡이라서? 물론 모두 다 떡을 더 맛있게 하는 요인이지만 나에겐 위로의 맛이었다.


남편이 장난스레 말한 덕이 부족하다는 그 말이 산행 내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떡을 먹다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마음에 걸려 경치를 보는 순간에도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정말 덕이 부족해서 여기까지 와서 경치를 못 본 것일까.'에서 시작한 생각은 아이를 안고 올라오는 부부를 보자 '덕이 부족해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건가.'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지나친 논리적 비약인 걸 알았지만 무심코 든 생각에도 한없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절떡을 받고 나서 그런 잡생각이 이상하게 싹 사라졌다. '자, 너는 덕이 부족한 게 아니야! 이렇게 떡도 받았잖아!' 오히려 운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위로 같았달까. 멋진 경치도 물론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역시 든든한 위로가 되는 건 배를 채워주는 음식인 건가. 뭐라도 입에 넣으면 생각이 달라지는 그 간사함에 놀라면서도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덕이 아니라 떡이 부족했던 것이다.


부족한 덕이 뭣이 중한데! 떡을 먹으면 잊히는 사소한 걱정까지 굳이 하지 말자고 생각하니 어느새 마음이 편해졌다. 하산하며 보이는 풍경에는 어느새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그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경치를 마침내 볼 수 있었다. 떡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도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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