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를 꿈꾸는 J는 즉흥여행이 소원입니다만,
9월이 되어서야 늦은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올해 휴가를 가지 않은 우리 부부에게 이번 2박 3일의 휴가는 소중했다. 우리의 여행지는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 매번 포기했었던 남해였다. 집에서 출발하면 편도로만 5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이기에 나는 너무 멀지 않겠냐고 에둘러 말해보았지만, 남편은 확고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는 것이었다. 어느새 휴가 일정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고,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계획을 짜야했다. 나는 미리 계획을 세워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지만 이번엔 훌쩍 떠나기에 너무나 먼 '남해를 정말 가겠어?' 하는 의심이 작용했다. 요새 일이 너무 바쁘다며 나에게 여행 계획의 전권을 위임한 남편은 다시 한번 여행지를 남해로 콕 집어 말했다. 이렇게 확실히 얘기해 주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계획을 짜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꼭 가고 싶은 곳, 꼭 먹어야 할 음식이 있는지 물으며 이번 여행 계획을 시작했다.
나의 MBTI는 ISTJ, 특히 계획에 살고, 계획에 죽는 파워 J형 인간이다. 다음 주의 나의 운동, 약속 등 나의 모든 일정이 나와있어야 이번주의 마음이 편하며, 심지어 주말에는 다음 주에 먹을 식단까지 짜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심각한 파워 J이다. 약속을 잡을 때도 만나는 시간뿐 아니라 헤어지는 시간까지 미리 정하고 통보해야 마음에 평화가 온다. 변수도 예상 가능한 범위에 있어야 하고,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야말로 피곤한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즐거운 여행도 계획을 짤 때만큼은 일처럼 피곤했다. 네 번의 유럽여행과 숱한 국내여행을 거의 다 자유여행으로 다녀왔다. 패키지여행과 달리 자유여행은 원하는 곳을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는 법. 이름은 자유여행이지만 계획을 짜는 데 나의 시간과 자유를 다 써버리는 사실상 (계획된) 자유여행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을 함께한 남편은 나에게 항상 말했었다.
"어차피 여행은 마음대로 안돼~ 변수가 항상 있으니 부담 가지지 마."
파워 J인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여행은 항상 변수가 생기니까 계획이 더 철두철미해야 해. 항상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나의 여행 계획 짜는 법은 사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곳의 유명한 관광지를 쭉 살펴본다. 인터넷을 보는 것보다는 여행책자를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국내여행의 경우 대표 관광지를 잘 소개하고 있는 지자체의 관광 홈페이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갈 곳이 추려지면 지도를 보며, 동선을 짠다. 경로는 항상 최단거리여야 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사실 관광지는 유명한 곳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숙소와 맛집은 취향을 크게 탄다. 잠만 자면 되니 가격만 저렴하면 된다는 가성비파도 있고, 깔끔함과 숙소컨디션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도 있다. 그 밖에도 호텔, 리조트, 펜션, 한옥, 에어비앤비, 글램핑 등 선택지는 천차만별이다. 나는 위치, 가격, 그리고 깔끔한 시설이 가장 중요하다.(다 보겠다는 건가?) 그리고 무엇보다 숙소가 먼저 정해져야 마음의 평화가 온다.
이번에도 숙소를 찾는데 가장 공을 들였다. 다음날 갈 관광지와 가까운지, 바비큐는 되는지, 오션뷰인지, 신축인지, 독채인지 등등 여러 가지를 비교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일로 정신없어 보이는 남편과 차마 상의할 수 없어 결정까지 혼자 해야 하니 더 힘들었다. 결국 고민을 하다 위치와 신축 여부를 중점적으로 두고 최소한으로 추릴 수 있었다.
숙소가 정해지면 그다음은 맛집 리스트를 뽑는다. 꼭 가고 싶은 맛집이라면 관광지나 숙소와 멀어도 가볼 것을 고려해보기도 하지만 무차별한 선택지가 여러 개가 있다면 숙소나 관광지 근처의 식당으로 정했다. 평일여행은 사람이 없어 좋지만 생각보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관광지 식당은 주말이 아닌 평일 하루가 휴무일이고, 생각보다 목요일에 쉬는 곳도 많았다. 이번에도 가고 싶은 식당을 첫날 가려고 했는데 그날이 마침 휴무일이라 계획을 다시 수정했다.
또한, 남해의 맛집은 점심 위주의 장사를 하고, 저녁 장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오후 4시에 문을 닫거나 저녁 5시에 라스트 오더인 경우가 많았다. 미리 찾아보지 않았으면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허탕을 칠뻔했다. 특히 나는 생선을 먹지 않고, 남편은 좋아하기에 바닷가 근처 여행을 갈 때는 유난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1인분도 파는지 아니면 같은 식당에 생선이 아닌 내가 먹을 수 있는 대체 메뉴가 있는지를 찾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무리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다고 해도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분명 이 여행을 남편도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같이 만족할 만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했다. '내가 가고 싶은 맛집을 남편이 좋아할까? 남편이 먹고 싶다던 멸치쌈밥을 1인분만 파는 식당은 대체 어디일까?' 등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의 웨이팅이 너무 길다면 이를 대체할 대안도 필요했다. 위치가 가깝거나 꼭 먹어야 하는 메뉴를 파는 맛집을 보통 2~3군데씩 찾아두었다. 한 곳이 안되면 바로 다른 곳으로 대체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러면 날짜별로 숙소, 맛집이 서로 다른 여행 계획표가 3~4개가 나온다. 여행사에서 나눠주는 패키지여행의 여행 계획표처럼 소요시간까지 빽빽이 적혀 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며칠 동안 틈틈이 시간을 내어 계획을 짰다. 하지만, 개미지옥처럼 짜면 짤수록 새로운 맛집과 숙소는 화수분처럼 나왔다. 자려고 누워도 머릿속에는 남해군 지도가 둥둥 떠다녔다. '첫날에 삼천포 쪽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마지막에 노량대교 쪽으로 나오는 게 더 효율적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둘러보는 게 맛집의 휴무일과도 겹치지 않아 계획대로 다 갈 수 있나?, 전통시장 장날은 언제인지?' 등등.
남편의 말처럼 어차피 여행은 맘대로 안되고, 변수가 있다. 이렇게 열심히 여러 개의 계획을 세워도 이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시간을 오래 끌자 1순위였던 숙소의 예약이 다 차버리기도 했다. 그걸 알면서도 또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이러는 건 온전히 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다. 정확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영 불안하기 때문이다.
화요일부터 슬슬 찾아본 여행계획이 마침내 금요일에 마무리가 되었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었지만 더 했다가는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남해군 지도가 그려지고, 찾아본 관광지, 맛집과 숙소 위치가 콕콕 박혀 밤새 눈에 아른거렸다. 일찍 자려고 누워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의도치 않게 잠을 통 못 잤고, 이러다 내가 나를 잡을 것 같아 평소보다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서둘러 숙소를 예약하는 것으로 계획을 마무리했다.
평소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은 <나 혼자 산다>이다. 전현무의 MBTI는 P(즉흥형)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즉흥여행을 떠나 멋진 바다도 보고, 맛있게 조개찜을 먹는 걸 보고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별생각 없이 훌쩍 떠났는데도 분명히 즐거워 보였다. 누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분히 쉬고, 즐기러 떠나는 여행인데 대충 하면 될걸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나도 이런 내가 가끔은, 아니 자주 피곤하다.
아직 여행을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왕복으로 남해를 몇 번을 다녀온 것 같다. 눈 감고 남해군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시작도 전에 벌써 지쳤다. 나도 전현무처럼 즉흥적인 P의 성향이 부럽다. 그래서 계획 없이 떠나는 즉흥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 성격은 잘 안 바뀐다는데 과연 이번생에 가능할까 싶다가도 빈틈없이 세운 여행 계획표를 남편에게 설명하며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역시 이번 생에서는 글렀다. 벗어날 수 없는 파워 J형의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나 싶다.
사진출처 : MBC <나 혼자 산다> 511회(2023.09.08.)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