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 내면탐구 Intro
어린이집에서는 상반기 하반기 한번씩 정기적인 학부모 상담을 한다.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정에서는 어떤 점을 연계하여 도와줄 수 있는지 등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자리라 항상 시간을 할애해서 참석하는 편이다. 어느덧 6세반이 된 아이의 기관 생활은 매우 모범적이며 특히 일과와 규칙을 잘 지킨다고 했다. 그런데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놀이나 만들기 시간에 가끔 스스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며, "아마도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실 거예요"라고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완벽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평소의 나는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일은 늘 데드라인까지 미루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지나서 보니, 스스로를 완벽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완벽주의 성향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구글에 완벽주의를 쳐보면 대충 이렇게 나온다. "완벽주의(完璧主義, 영어: Perfectionism)는 이루기를 원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보다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이다." 그러니까 완벽주의는 완벽한 상태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를 이뤄야 한다고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완벽의 기준을 달성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므로, 스스로 늘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지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나의 정신세계를 기준으로, 어떻게 괴롭히는지 살펴보자.
최고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최고로 해낼 수 없는 일은 회피한다. 잘하지 못할 바에야 안 한다라고 생각하여,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손대지 못하고 미룬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라서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계절의류를 정리하는 단순한 집안일조차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시작이 어렵다.
최적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선택장애가 심하다. 어떤 선택지도 장단점이 있다는 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벽한 선택지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선택지를 찾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결과적으로 선택을 하지 못한다.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비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견디기 어렵다. 최적화, 효율화, 루틴 등에 집착한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필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여 결과적으로 또 할 일을 다하지 못한다.
하고 싶은 것이나 되고 싶은 것이 불가능 수준으로 많다. 이를테면 청소는 브라이언처럼 해야 하고, 요리는 요리인플루언서 정도, 집 팬트리 상태는 인스타에 나오는 수준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일과 육아도 잘 해야 하며 성품도 우아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최고로 못할 바에는 시작을 못하기 때문에 현실은 시궁창이며,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자책한다.
한평생을 뭐든지 잘하고 싶었다.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히 다들 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라는 개인의 특성이며, 남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을까? 십수년을 무기력, 우울, 불안, 자기비하로 힘들어하며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고 상담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스스로를 괴롭히는 습성이 하루아침에 좋아질 리 없겠지만, 접근법을 알았으니 이제 실천만 남은거 아닌가!
이 놀라운 깨달음을 친구에게 전했다. 있쨔나 그동안 내가 단순히 게으른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드디어 찾았다니까!!! 친구는 나의 이야기를 예의상 들어주고 난 후, 근데 제리야 그건 그냥.. 하기 싫은거야.. 라고 대답했다. 상당히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깨달음의 첫번째 실천으로 완벽주의자의 사고방식에 대한 묘사를 좀 더 상세히 해보기로 했다. 완벽한 글이 아니더라도 써보자!
당연하게도 나는 완벽주의자의 대표 같은 게 아니다. 완벽주의란 것 자체가 광범위하고 모호한 개념이라, 그 성향이 어떻게 발휘되고 작용하는지는 개개인의 특성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쩌다 나와 비슷한 사람도 존재할 테고,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왜 더 완전해지지 못하는가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함께 이 몹쓸 병을 이겨나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