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이 계획이다
엄마의 칠순은 작년이었다.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LA가 물망에 오를 때쯤 산불이 났고, 또 비행기 사고가 났고, 또 아무도 진행을 하지 않고 해서 손주(내아들)가 초등학교에 갈 지경이 되어갈 때쯤, 더 미뤘다가는 못갈 듯한 위협을 느낀 내가 무작정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그냥 대충 젤 비수기인 추석과 크리스마스 사이로..
그리고 뒤늦게 임시백수인 동생도 합류하기로 하여 여행의 구성원은 4명이 되었다. 나와 내 아들(7세), 엄마와 엄마의 아들(38세).
In/Out은 있으나 행선지는 없었다. 출발을 몇 주 앞두고 루트를 짜보고자 구성원의 니즈를 취합해보았다.
나
- 나의 고향(?)이 얼마나 변했는지 구경이나 해보고 싶다.
- 아들이랑 현지 서점이나 장난감가게 가고싶다.
- 크리스마스마켓 가고싶다. (이건 날짜 문제로 실패)
- 아들에게 스위스 알프스 구경시켜주고 싶다.
내 아들
- 독일 레고랜드
- 파리 에펠탑
- 모나리자
- 별이 빛나는 밤 (그건 미국에...)
- 그 외에 지가 유럽에 대해 아는 것 자유롭게 자랑함
엄마
- 서유럽은 다소 지겹고 동유럽 가고싶다. 프라하..?비엔나..?
- 여유있게 다니자.
- 맛있는 것 먹고 싶다.
동생
- 정해진 대로 따르겠다
- 그래도 하나 고르자면 베네치아..?
취합한 목적지들이 대충 동서남북으로 위치해 있어 상당한 곤란함을 느꼈다. 일단 얘기나온 곳들을 죄다 저장한 후 한붓그리기 하는 기분으로 연결해 보았다.
기적의 도장깨기 동선... 이건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우선 동쪽을 조금 자르고, 동선에서 너무 튀어나온 파리도 (아들 몰래) 잘라보았다.
자그레브는 왜자꾸 넣냐는 항의와 에펠탑은 왜 빼냐는 항의가 발생했다. 아들에게 에펠탑 대신 피사의 사탑을 제안해보았고 아들은 흔쾌히 그것도 재밋겠다고 했다. 후닥닥 경로를 수정해보았다.
이거면 됐다. 비엔나에서 베니스가 하루 거리는 되어보이지만 운전이야 교대로 하면 되니 우선 모르는 척 하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정말 이렇게 떠나냐고...?
웅.. 다니다가 너무 좋아서 하루 더 있고 싶은데 숙소 때문에 억지로 떠나고 싶지 않고, 피곤해서 하루 쉬고싶은데 다음 일정이 있어서 억지로 가야하는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출국 전에 준비한 것은 이 정도였다:
- 왕복 항공편 (프랑크푸르트 In/Out)
- 여행 전 기간 렌트카
- 첫 날 도착해서 묵을 숙소
- 여행자보험
- 노트북, 로밍된 핸드폰, 다소의 독일어/영어
그리고 무계획 여행에 반드시 필요한, 보부상 스타일의 맥시멀리스트 캐리어. 원래 나는 위탁수하물조차 없는 미니멀리스트 여행객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전생의 이야기인 것 같다. 지금 내 캐리어에는..
- 반팔부터 패딩까지 모든 기후를 커버 할 옷
- 수영복부터 눈장갑까지 모든 액티비티를 커버할 준비물
- 과도부터 전기포트까지 갖춘 포터블 주방 (소금도 있다)
- 성인과 어린이의 일반적인 모든 증세를 커버할 수 있는 상비약
- 아들의 애착이불과 각종 놀잇감
등등이 들어있다.
일정만 없을 뿐 모든 준비는 끝났다.
18박 20일 무계획 자유여행을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