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를 이야기할 때 구엘 그리고 조셉 마리아 유욜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어찌 보면 가우디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먼저 구엘은 벽돌회사 사장이자, 아메리카와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업가다. 그렇다. 졸부다. 모든 졸부가 그러하듯 구엘은 높은 수준의 작품과 건물을 수집해 굳이 귀티를 내기를 원했다. 갑자기 성공하면 슈퍼카나 귀금속, 그림 같은 걸 사 모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졸부와 다른 점이라면 한눈에 가우디를 알아본 감각이었다.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가우디가 만든 코메야를 위해 만든 유리 전시장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것이 역사에 구엘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가우디 : 나의 건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인가 봅니다.
구엘 : 아니요. 나는 당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건축가인 당신을 존경합니다.
가우디의 제자가 가우디를 음해할 목적으로 자재 구입 장부를 작성해서 구엘에게 따로 보고 했다. 굳이 비싼 자재를 쓸 필요가 없는데, 가우디가 돈을 흥청망청 쓴다는 것이 보고의 요지였다. 구엘은 제자가 가져온 장부를 보고 화를 내며 가우디를 불렀다.
구엘 : 나를 욕보일 생각이요? 누가 돈을 이렇게까지 아끼라고 했오?
가우디 : 구엘은 진정한 신사다. 돈을 가지고 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돈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조셉 마리아 유욜은 누구인가? 가우디와 고향이 같았다. 그래서인지 가우디와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 특히 자연에 대한 사랑은 둘 다 남달랐다. 가우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반면, 유욜의 지명도는 미미하다. 그러나 그는 가우디의 작품들 중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사 바트로(the Casa Batlló (1904–6)), 카사밀라(the Casa Milá (1901–10)), 구엘공원( the Parque Güell (1900–14))의 건축, 마요르카의 팔마 대성당등에 참여했다. 가우디 작품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다채로운 깨진 타일 모양은 가우디가 유욜에게 일임하여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유욜이 집에서 식사 중에 도자기 접시가 깨졌을 때 깨진 타일을 본 유욜이 아이디어를 냈다) 유욜이 참가하기 이전에는 수수하고 전체의 조화를 중시한 색채를 써왔으나, 유욜이 참여한 이후 밝고 화려하며 불규칙적인 색채를 대담하게 사용하고 있다. 유욜은 미술도 전공했다. 가우디의 천재적 조형능력과 유욜의 색채 감각이 더해져, 세계적인 건축물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엘 가문 전담 건축가로 가우디가 아닌 유욜을 선택했다면 바르셀로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우디의 명성에 가려진 유욜이 안타깝다.
시내에서 산으로 올라간 버스는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아 구엘공원에 들어섰다. 한눈에 바르셀로나 시내와 멀리 항구까지 다 보였다. 그 당시 부자들은 배를 통한 무역을 했다. 집 안에서 내 배가 들오는지, 나가는지, 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구엘 공원의 특징 중 하나는 그 당시 아무도 생각지 않은 재활용 건축물을 사용한 점이다. 깨진 타일이 대표 적이다. 그리고 자연 친화적인 건축을 했다는 점이다. 원 상태를 최대한 살린, 다듬지 않은 돌들을 건축에 사용했다.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까지 모으고, 사용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웅장하고, 고급스러웠다. 마지막으로 구엘 공원에서 놀라운 점은 관광지가 되어버린 공원 안에, 가우디의 건축물이 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우디의 건축물 안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랄까? 콘크리트 아파트가 숲처럼 둘러싸인 곳에 있는 우리 초등학교와 비교되었다. 살바도르 달리가 머리에 대고 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한 달리의 십자가는 구엘공원의 주요 포토스폿이다.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다. 아쉬운 대로 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구엘공원은 어디든 포토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