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엘 공원 투어를 마친 가이드 차량은 우리를 처음 모였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근처에 내려주었다. 구엘 공원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아빠, 저 코너만 돌면 El Glop Gaudí가 보여. 사거리에 있으니까 찾기 쉬울 거야. 나는 이어폰 반납하고 따라갈게. 아빠 먼저 가서 줄 서.”
“왜? 맛집이야?”
“아빠가 먹고 싶다던 먹물 빠에야 집이야. 빨리 뛰어!”
재촉하는 딸의 목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길 때, 나는 대답도 없이 바람처럼 달렸다. 먹물 빠에야는 나에게 또다른 흥분이었다. 쏜살같이 달려 El Glop Gaud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의외로 웨이팅이 없었다. 문 앞에서 웨이터가 몇 명이냐고 묻고는 바로 자리로 안내해 줬다. 잠시 후, 문밖에서 실내를 기웃거리는 딸이 보였다.
“들어와! 웨이팅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 웨이팅 보통 한 시간은 기본이야.”
“다른 집 아니야?”
“아니야, 전에 와본 곳이야. 간판도 맞잖아.”
“그럼, 설마 음식 맛이 변했나?”
“일단 주문부터 하자. 아빠는 맥주?”
나는 맥주를, 딸은 샹그리아를 시키고, 먹물 빠에야와 이베리코 스테이크도 주문했다. 뜨거운 구엘 공원의 햇살에 지친 나는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마셨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음식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딸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나와서 보니 웨이팅 줄이 이미 코너를 돌아 길게 서 있었다. 줄 끝까지 걸어보고 식당으로 돌아가는 데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러면 좀 놀부 심보일까?
“우리 들어온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웨이팅 줄이 코너를 돌아서 길게 늘어섰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럼 그렇지. 나도 전에 왔을 때 한 시간 기다렸어. 우리 진짜 러키 비키네.”
“아빠가 행운을 몰고 다니는 거지.”
“아니거든. 내가 뛰라고 안 했으면 한 시간 기다렸을걸?”
딸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우리가 주문한 먹물 빠에야와 이베리코 스테이크가 나왔다. 먹물 빠에야는 정말 시커먼 색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먹물만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어때? 상상한 맛이야?”
“와, 부드러운 먹물 맛이 굉장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먹물, 먹물 하는구나. 너도 먹어봐.”
“나는 전에 먹었는데, ‘와’ 정도는 아니었어.”
“밥알 말고, 먹물만 떠먹어 봐. 진짜 부드럽고 크림 같아. 그리고 신기하게 시커먼 밥알이 눅눅하지 않고, 꼬들꼬들해. 어떻게 요리했을까?”
먹물 빠에야는 오징어, 새우, 홍합을 건져 까먹는 재미도 있었다. 이베리코 스테이크는 캠핑하러 가서 숯불에 구운 목살과 갈비의 조화를 떠올리게 했다. 촉촉한 육질과 한입 물면 터져 나오는 육즙이 환상적이었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고기가 입에서 소리 없이 녹았다.
“고기랑 감자를 같이 먹어봐. 여기는 감자 맛집이야. 너무 잘 어울려.”
“바르셀로나가 감자가 유명해. 내일쯤 감자튀김 먹으러 갈 건데, 그때 놀라 자빠질걸? 나도 처음 먹었을 때 기절할 뻔했어. 우리가 지금까지 먹었던 감자튀김은 감자튀김이 아니었어. 우리는 속고 살았던 거야.”
“아무튼, 나는 먹물 빠에야도 그렇고 스테이크도 그렇고 덜 짜서 좋다.”
“아마 적당한 염분 때문에 한국 사람들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아.”
만족스러운 늦은 점심을 마친 나는 슬슬 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아이스크림 안 당기니? 여기 와서 나는 어린이가 된 것 같아. 한국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누가 사주면 먹었지, 내가 사 먹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스페인은 밥만 먹고 나면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이 생각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