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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Apr 08. 2024

사전투표들은 다 하셨습니까?

 독서 모임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아직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 전이라 회원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차가운 얼음이 가득 찬 커피를 주문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늘 조금 늦으셨네요?”

“선거운동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때였다. 곁에 있던 분이 ‘여기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며 성을 냈다. 나는 정치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다만 왜 늦었냐는 질문에 대답했을 뿐인데 조금은 억울했다. 사람들의 정치 혐오증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을 때 그분이 오히려 정치 이야기했다. 정치인들은 모두 똑같다며, 그럼에도 빨갱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 빨갱이 소리에 그 선생님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관리자들의 욕설과 폭력이 정당화되는 현장이었죠. 사장은 외제차 타면서도 임금체불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라면봉지 만드는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직해서 30년을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대학 가기 위해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아들은 취직하기 위해서 몇 년을 고등학생처럼 공부하며,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저의 딸은 회사에 취직했지만, 사내 성희롱을 수시로 당했습니다. 남자 사원들이 계단 밑에서 올라가는 여직원들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것은 일상이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성차별을 겪었습니다. 제가 다닌 회사 동료중 한 명은 성소수자였습니다. 근무와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성적 취향으로 갖은 욕설과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했죠. 제가 한국어를 가르쳐준 분들은 이주민 여성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가르친 말이 무엇일까요? ‘때리지 마세요. 때리면 신고할거에요.’ 였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단원고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습니다. 회사 동료의 아이, 집 앞 슈퍼집 아이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 한마디에 304명이 죽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투표권이 생긴 이후로 제가 투표해서 당선된 후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의 투표 성향은 저의 삶과 가치관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만약 종부세를 내는 부자였거나, 회사 대표, 의사, 검사였으면 저의 투표 성향도 저의 삶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졌을 겁니다.”

“보기보다 오지랖이 넓으시네요.”

“제가 키는 작아도 오지랖은 좀 넓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제가 토요일에 고양시 화정역으로 선거운동을 갔습니다. 처음 간 화정역에서 제가 처음 본 풍경이 무엇일까요? 지하철 계단을 오르니 사람들이 한 가게 앞에 줄을 길게 서 있더군요. 처음에는 맛집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로또 명당 집이었습니다. 우리는 로또 말고는 내 삶을 변화시킬 수가 없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침에 전철역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 저는 전철역 앞에서 아침에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선거운동을 합니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입니다. 모두 뛰거나, 빠르게 걷습니다. 영혼이 없는 표정으로 꼭 죽으러만 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하십니까?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가 정치영역인 세상에서, 아니 요즘은 미세먼지나 RE100처럼 기후도 정치영역으로 들어간 지 오래됐습니다. 제가 당비를 내고, 후원금을 내고, 자원봉사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비정규직 없는 나라, 장애인과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나라,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 서민들의 삶이 행복한 나라, 기후 위기에서 벗어난 나라, 결론적으로 녹색으로 정의로운 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선거운동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저에게 빨갱이 소리를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른 분들에게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지금도 구구절절 길게 말하며, 빨갱이를 강요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강요 안 합니다. 제가 강요한다고 선생님이 제 말을 듣고, 투표할까요? 모두 삶과 가치관이 다른데 어떻게 강요합니까? 선생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하세요. 저는 선생님의 가치관을 존중합니다. 그러니 제 가치관도 존중해 주세요.”     

 우리의 토론을 지켜보던 사회자가 손을 저으며 이야기했다.

“자, 그만들 하시고 독서토론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전투표들은 다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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