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바친 한조각 마음 괴로운데

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28)

by 천산산인

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28)


나라에 바친 한조각 마음 괴로운데

< 우제 (偶題) >

--- 우연히 짓다

今日知何日 (금일지하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겠네

春風動客衣 (춘풍동객의)

봄바람이 나그네 옷을 날리고 있으니

人遊千里遠 (인유천리원)

이 몸은 천 리 밖 먼 곳에서 머물고 있건만

雁過故山飛 (안과고산비)

기러기는 고국의 산을 날아서 지나가고 있겠지

許國寸心苦 (허국촌심고)

나라에 바친 한조각 마음 괴로운데

感時雙淚揮 (감시쌍루휘)

시절을 느끼니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네

登樓莫回首 (등루막회수)

누각에 올라 머리를 돌리지 말라

芳草正菲菲 (방초정비비)

향기로운 풀들이 한창 푸르르단다.


누각에 올랐다. 저 멀리 시카시마(志賀島)와 노코시마(能古島) 두 섬이 바다에 잠겨 있고, 그 너머 서북쪽 고려 방향으로는 망망대해가 아스라하다. 미카사(御笠)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동쪽으론 넓은 벌판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포근한 바람이 도포 자락을 펄럭인다.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리고 있다. 봄이 왔다. 꽃망울이 피어나고 있건만 이역만리(異域萬里) 낯선 고장에 머무는 나그네는 그럴수록 더욱 외롭다. 이 몸은 천리 밖 타향에 머물고 있지만, 저 기러기들은 날아서 고국의 산을 넘어가겠지. 막중한 임무를 띄고 온 사행(使行) 길. 그러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분주하건만, 어찌하여 이 내 가슴에 계절의 정취가 차오른단 말인가. 애써 참아 보지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짐짓 다짐해 본다. 더 이상 청승 떨지 않으리라. 이 좋은 계절, 이 아름다운 누각에 올라서까지 고개를 돌려 고향생각에 젖지 말자. 저 벌판 가득, 온 사방에 새 봄의 향기로운 풀들이 푸릇푸릇 돋아나고 있는데... 왜국(倭國)에 온 지 어언 수개월, 이국에서 맞는 새 봄의 정취와 나그네의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는 아름다운 시다. 이 시는 고려 말 사신으로 일본에 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작품으로 1378년 초 구주(九州) 지방의 하카다(博多, 후쿠오카)에 있는 누각 패가대(覇家臺)에 올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를 지을 당시 고려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대격변기였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명(明)나라를 건국하고 천자로 등극한다. 그 이후 원(元)을 옛 몽골의 본토인 막북(漠北)지역으로 쫓아냈다. 동북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바뀐 것이다. 일본에서도 1336년부터 1392년까지 두 명의 천황이 각축하는 남북조 시대이자, 가마쿠라(鎌倉) 막부에서 무로마치(室町) 막부로 권력이 이행하는 시기였다. 중앙의 권력이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자 북큐슈 지방의 유랑민들이 왜구로 결집하여 동아시아 해안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충정왕 시기부터 본격화 된 왜구의 침입은 우왕 집권기 14년간 378회 침입할 정도로 절정에 달하였다. 1377년(우왕 3년) 한 해에만 왜구가 29차례나 고려를 침공하여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정몽주는 일본으로 갔다.

주지하다시피 포은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충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를 충절의 화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후일 태종이 된 이방원은 포은에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중종대에는 조광조의 건의로 문묘에 배향되어 오늘날까지도 동방 18현의 한 분으로 존숭 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이고, 조선조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숭앙 받기에 합당한 분인가? 그는 당초부터 이성계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2살 연상인 그와 친한 사이였다. 따라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도 방조하였고, 그 일당과 동조하여 우왕과 창왕을 폐하는데 앞장섰던 불충한 신하였다. 이성계의 비호 하에 승진을 거듭하여 공양왕 때는 이성계와 공동으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단지 고려왕조가 멸망하기 직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척살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가 입고 있는 만고충신의 이미지는 실제 행동보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묵살해 버린 그의 한시 <단심가(丹心歌)>가 누군가에 의해 비장한 시조로 잘 각색되어,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부각된 문학적 상상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이 몸이 주거주거 일 백번 고쳐 주거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백골이 진토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야여)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쉴 줄이 이시랴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배신한 동지인 그를 용서할 이유도, 추앙할 논리도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인 정도전은 끝까지 패역한 간신으로 폄하하면서,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으로 상징조작하여 숭상하는 것은 실로 조선조의 아이러니이자 자기부정이다. 태종은 시호를 내리고, 그의 묘역을 왕릉에 버금가게 꾸며 줌으로써 30살 연상의 스승인 정몽주를 죽인 자신의 도덕적 패륜을 씻어 내고자 했고, 유림들은 마지막 순간 역성혁명파에 의해 척살(刺殺)된 포은을 충절의 표상으로 내세움으로써 자기네들이 왕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이념적 과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는 왕조의 정신분열증이자, 유림의 집단최면이다. 돌아가신 포은선생께서도 그를 참살한 원수들과 그들에게 추종했던 무리들이 당신을 추증하고, 그토록 존숭하는 짓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가증(可憎)스러울까?

그렇다면 정몽주는 존숭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분인가? 그렇지 않다. 정몽주의 가장 큰 위대함은 충절이 아니라 그의 외교적 역량과 담대한 성품, 그리고 그의 글재주다. 그의 사행길은 일부 역관(譯官)을 제외하고는 조선조 말까지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고난의 역정이었다. 그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6번, 일본에 1번 다녀왔다. 그것도 조선 사신들이 겨우 연경(燕京, 북경)으로 간 반면 그는 훨씬 먼 남경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그 가운데 1372년 첫번째 사행길은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고행길이었다. 1371년 명(明)은 서촉지방에 있던 대하국(大夏國)을 정벌하여 중국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동안 원(元)과 명(明)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면서 관망하던 고려는 더 이상 명(明)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1372년(공민왕 21년) 3월 촉(蜀)을 평정하였음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명나라로 파견한다. 하평촉사(賀平蜀使) 사절단의 정사(正使)는 홍사범이었고, 당시 36세였던 정몽주는 부사(副使) 격인 서장관으로 사행 길에 오른다. 사절단을 실은 4척의 배는 순조롭게 황해를 건넌 후,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응천부(應天府, 남경)에 이르렀다. 사절단은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허산(許山)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정사(正使)가 탄 배는 파선되어 39명 전원이 익사하고, 다른 배에 탄 113명은 13일 동안 표류하다가 겨우 12명만 구조된다. 정몽주도 말안장을 씹으며 굶어죽는 것을 면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명 황제의 칙서(勅書)를 물에 젖지 않도록 품에 간직해 보전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어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 1328-1398)는 정몽주를 갸륵히 여겼다. 그는 황제의 배려로 남경으로 초빙되어 위로를 받고, 하사품을 새로 받아서 장강 하류의 창저우(常州)에서 겨울을 지낸 후 이듬 해 7월 개경으로 귀국한다.


1377년 9월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 이 당시 왜구가 자주 내침하여 피해가 심하므로 고려 왕조는 1375년(우왕 원년) 나흥유(羅興儒)를 금구사절(禁寇使節)로 일본에 파견하였으나, 당시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그를 정탐꾼으로 여겨 옥에 가두었다. 다행히 고려 승려 양유(良柔)가 그를 알아보고 아사(餓死) 직전에 구출되어 1년 9개월 만에 돌아왔다. 그 다음에 보낸 안길상(安吉祥)도 억류되어 있다가 3년 6개월 만에 겨우 귀국하였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보빙사(報聘使)로 선뜻 나서지 않을 때였다. 조정의 권신들은 언양으로 유배 보낸 정몽주를 해배하고는 일본 사행을 명하는 꼼수를 쓴다. 정몽주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하카다(博多)로 가서 막부의 장군인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을 만났다. 그는 중국 역사의 예를 들어 교린(交隣)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왜구를 단속해 줄 것을 조리있게 요청하였다. 정몽주의 학식과 인품에 감화된 이마가와가 왜구를 단속할 것을 약속하고, 윤명(尹明) 등 잡아간 고려의 백성 수백명도 쇄환(刷還)하게 하여 9개월 만에 그들과 함꼐 귀국하는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귀국 후 정몽주는 왜구가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여러 재상들을 설득하여 약간씩 사비를 걷어 속전(贖錢)을 마련하였다. 그는 포로에서 쇄환된 윤명에게 이 돈과 자신이 쓴 글을 구주절도사에게 전달하라고 파송하였고, 이마가와 료순은 정몽주가 쓴 간절하고 슬픈 글을 보고 또 다시 포로 100여 인을 돌려보내 주었다. 이 후에도 윤명이 갈 때마다 포로를 데리고 돌아올 수 있었다.


1382년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사행은 명나라로의 입국이 요동에서 거절되어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되돌아와야만 했다. 1384년의 다섯 번째 사행은 공민왕 시해 사건과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살해사건으로 여명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던 시기였고, 명은 군사적 위협을 언급하며 세공을 5배 증가시키고, 고려사신 홍상재(洪尙載)를 유배 보낸 뒤 당시 문하시중인 친원파 이인임의 출두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이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을 때 우왕이 그에게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올 것을 부탁하자 그는 “임금의 명이라면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께 경배드리는 일이지 않습니까? (君父之命, 水火尙不避, 况朝天乎)”라고 하며 그 즉시 서둘러 남경으로 가서 명 태조를 직접 알현하고 양국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왔다. 1386년의 여섯 번째 사행에서도 홍무제를 직접 알현하여 세공을 감면받고, 밀린 세공까지 탕감 받는 성과를 거둔다. 정몽주가 중국 사행에서 국가적 난제를 거듭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포악하고 괴팍한 성격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정몽주의 충정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387년의 마지막이 된 그의 일곱 번째 사행은 또 다시 요동에서 입국이 거절되었다.


붕정만리(鵬程萬里), 사행길은 험한 산을 넘고 거친 파도를 넘어 가는 역경(逆境)이었지만 정몽주는 오로지 충정심 하나로 그 먼 길을 헤쳐 나갔다. 그가 일본 큐슈(九州)에서 지은 시에서는 “사나이 평생 멀리 떠다니기 좋아하니(男子平生愛遠遊), 어찌 낮선 땅에서 머무름을 탄식하리오(異鄕胡乃歎淹留) ... 때때로 성 남쪽에서 술을 마시니(時來飮酒城南市), 호탕한 기운 오히려 구주를 채울 수 있도다(豪氣猶能塞九州)”라고 제법 호방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행길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는지 아래의 시로 자신의 타고 난 역마살(驛馬煞)을 한탄하고 있다.

白雲從東來 (백운종동래)

흰 구름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니

悠然思故鄕 (유연사고향)

아득히 고향이 생각나네

故鄕萬餘里 (고향만여리)

고향이 만여 리나 멀어

思歸不可得 (사귀불가득)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라.

人生百歲內 (인생백세내)

인생길 백 년 미만인데

光景如過隙 (광경여과극)

살아감이 짦은 틈새를 지나는 것 같구나

胡爲不自安 (호위불자안)

어찌하여 스스로 편안히 지내려하지 않고

而作遠遊客 (이작원유객)

먼 길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는가


또한 정몽주는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저명한 성리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24살 때인 공민왕 9년(1360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어 대사성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몽주는 이미 성리학의 요체를 꿰뚫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너무나 유창하게 강론하였기에 듣는 사람들이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 뒤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도입되어 이를 참조해보니 정몽주의 강론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탄복했다.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스승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까지 극찬하였다. 그는 중국에서도 ‘대유(大儒)’라고 지칭되었고, 그의 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명나라 말 문단의 영수였던 전겸익(錢謙益)이 편찬한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조선 시인 42명의 시 170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포은의 시 16수가 인용되어 단연 가장 큰 비중으로 소개되고 있다. 일본에 갔을 때도 포은의 작시능력은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승려들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교우하였고, 승려들은 그의 시를 받기 위해 가마를 준비하여 그를 경치 좋은 곳으로 모시고 다녔다. 그의 시에 감화된 일본 승려들의 천거로 정몽주는 당대 ‘일본 제일의 가인(歌人)’이란 별칭을 갖고 있던 대장군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과의 대담을 원활하게 진행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풍류객들 사이의 장쾌한 교감이 빚어낸 수창(酬唱)외교의 성과였다.


이와 같이 정몽주의 인생행로는 동북아 전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그는 늘 호방함을 과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 살고픈 자하상(紫霞想)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지은 또 다른 시에는 이러한 그의 숨겨진 소망이 오롯이 담겨있다.

僑居寂寞閱年華 (교거적막열년화)

타향살이 적막한 채로 한 해를 지내는데

苒苒窓櫳日影過 (염염창롱일영과)

창 밖의 해는 덧없이 지나가는구나

每向春風爲客遠 (매향춘풍위객원)

매번 봄바람 불 때 멀리서 나그네 되니

始知豪氣誤人多 (시지호기오인다)

호기가 사람 일 그르칠 때 많음을 알겠노라

桃紅李白愁中艶 (도홍이백수중염)

붉은 복사꽃과 흰 오얏꽃은 근심 중에 더욱 요염하고

地下天高醉裏歌 (지하천고취리가)

땅이 낮고 하늘이 높음은 취중에 노래하노라

報國無功身已病 (보국무공신이병)

나라 은혜 갚을 공도 없이 몸은 이미 병드니

不如歸去老烟波 (불여귀거로연파)

고국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늙어감만 못하리라


정몽주의 절친한 벗이었던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은 그의 성격을 “채마밭 만들어 진정한 취미를 누리니, 근심이 찾아들면 쾌활하게 읊조리네(爲圃有眞趣 憂來快活吟)”라고 묘사하고 있다. 정몽주는 자신의 호처럼 “채마밭에 숨어서(圃隱)” 살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그의 재주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시대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포은의 시는 그의 호방한 성격을 반영한 장쾌한 시가 대종을 이룬다. 그러나 표제의 시는 객창의 우수가 듬뿍 밴 감성적인 시다. 숨겨두었던 포은의 다정함이 엿보인다.


포은 선생의 묘역은 선산이 있는 고향 경북 영천이 아닌 경기도 용인시에 있다. 1392년 순절한 직후에는 개성 풍덕군에 임시 매장되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임금이 되고 6년차가 된 1406년, 태종은 문득 정몽주의 묘를 고향 선산으로 이장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이장 행렬이 용인 땅을 지날 때 일진광풍이 몰아쳐 그의 명정(銘旌)이 현재의 묘소자리로 날아간 후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묘역의 좌향(坐向)은 길지의 표상인 남향이 아니라 북서향이었다. 고려조의 충신답게 왕궁이 있던 개성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다. 이렇듯 포은 정몽주는 어쩔 수 없는 만고의 충신이다.


인생길 백년 미만인데
어찌하여 먼길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는가?


글씨: 허봉(虛峰) 길재성(吉在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