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41)
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41)
꿈에서라도 무릉도원에서 살고 팠건만...
< 武溪精舍雜詠 (무계정사잡영) >
-- 무계정사에서 읊은 시
偸閑無事俺柴扉 (투한무사엄시비)
모처럼 아무 일 없이 한가로워 사립문 닫았는데
塵世親朋到者稀 (진세친붕도자희)
티끌세상 친구들 찾아오는 이 드물구나
細逐春敷紅灼灼 (세축춘부홍작작)
잔가지 물러간 봄날이 펼쳐지니 꽃들은 붉게 타오르고
不隨霜謝綠猗猗 (불수상사록의의)
서리 따라 시들지 않은 푸르름 아~ 아름답도다
黃鸝上樹間開語 (황려상수간개어)
꾀꼬리는 나무에 앉아 간간히 말문을 열고
玄鳥巡簷慣習飛 (현조순첨관습비)
제비는 처마 돌며 익숙하게 날아다니네
誰說市朝金帛貴 (수설시조금백귀)
누가 저자의 황금과 조정의 비단이 귀하다고 하였는가
靑山亦有紫莖芝 (청산역유자경지)
청산에도 또한 붉은 줄기의 지초가 있거늘
수년전 꿈속에서 복숭아 꽃 만발한 아름다운 마을,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노닐었다.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화공 안견(安堅)에게 일러 그림으로 간직하였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당대 최고 화공의 솜씨이니 보는 이마다 찬탄을 금치 못했지만, 그래도 물소리, 새소리가 들리지 않고, 꽃향기도 맡을 수 없으니 아쉬웠다. 이 세상 어딘가에 바로 그 장소가 있을 것만 같았다. 도성 서북쪽 인왕산 깊은 계곡에서 유사한 장소를 발견했다. 정자 한 채를 마련하고, 무릉계곡에 있는 정자라 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로 명하였다. 멋진 경치를 혼자 즐길 수 없기에 일대의 문사들을 청빙하였다. 오는 이들마다 멋진 경치에 감동하여 쓴 글이 48편이나 되었다. 주인인 나도 몇 수 읊으리라. 춘하추동의 정취를 담은 5수를 짓고 「무계정사잡영(武溪精舍雜詠)」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다. 봄날에 오른 무계정사는 자못 흥취가 가득하다. 신록이 피어오르고, 산새가 우짖으며, 무엇보다 붉디붉은 봄꽃이 만발하였다. 이 화사함이 어찌 저 아래 도성이나 궁궐의 화려함에 미치지 못하리오. 이 곳엔 한가로움마저 그득하니...
이 시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의 작품이다. 안평은 세종의 아들 18명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아들(후일 문종)은 성품이 온후하고 학구적이었으며, 둘째 수양은 무인기질로 호방하고 음악에 뛰어났던 반면, 셋째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술적, 예술적 자질이 뭇 형제 중 가장 빼어났다. 그는 시서화(詩書畵) 모두 빼어난 경지에 이르러 삼절(三絶)로 불렸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안평대군의 인물됨에 대해 “비해당(匪懈堂, 안평의 호)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더욱 시문에 뛰어났다. 서법(書法)은 천하제일이 되었고 또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 타는 재주도 훌륭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재주가 넘치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듯이 감수성이 예민하고 성격이 진중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던 것 같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도 “성격은 부탄(浮誕, 들뜨고 허황)하여 옛 것을 좋아하고 경치를 탐하였다..... 혹은 밤에 등불을 켜고 얘기하고, 혹은 달이 뜰 때 뱃놀이를 하며, 혹은 도박을 하거나 거문고를 뜯으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희희덕거리기도 하였다. 당대의 명유(名儒)로서 그와 교제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잡업에 종사하는 무뢰한 사람들도 또한 그에게 돌아갔다.”라고 하고 있다. 부왕인 세종께서도 그의 집에 들러 당호(堂號)를 “게으름 피지 않는 집”이란 뜻의 비해당(匪懈堂)으로 지어준 것을 보면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학문 연마에 좀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고 보여진다.
1450년(세종 32년)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경태제(景泰帝, 재위 1449-1457)의 등극을 알리는 조칙을 가지고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접반사로 나온 공조판서 정인지, 집현전 학사 성삼문, 신숙주와 더불어 시로써 창화(唱和)하며 사행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숙주가 들고 있는 서책의 ‘범옹책(泛翁策)’이란 글씨를 보고 놀라서 누구의 필체인지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사신들을 위해 태평관에서 주연을 베풀던 자리에서 명사(明使) 예겸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지금 중국에서는 진겸(陳謙)이 글씨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왕자의 필체에 미치지 못합니다. 참으로 송설옹(松雪翁, 조맹부)의 삼매(三昧)를 얻은 글씨입니다.”라고 칭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고무된 안평대군은 하룻밤 사이에 행서와 초서 수백 장을 써서 중국 사신들에게 나눠주었고, 이들은 각기 시를 지어 감사를 표하였다. 일대의 대학자로 명나라의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이자 스스로 명필임을 자부하는 예겸이었지만, 그는 안평대군의 글씨에 매료되어 이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명의 사신들은 이 때 구해 간 안평대군의 글씨를 황제에게 바쳤는데 이 때 황제가 “참으로 좋도다. 진정으로 이것은 조자앙(趙子昂, 조맹부)의 서체로다.”라고 말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안평대군의 막내 동생인 영응대군(永膺大君,1424~1467)의 후손인 이선(李選, 1632~1692)이 남긴 『영릉육대군전(英陵六大君伝)』에는 “... 이해 겨울 명나라 태감 윤봉(尹鳳)이 조칙을 받들고 와서, 앞서의 예겸과 사마순 두 사신이 중국에 돌아가 공의 글씨를 헌정했더니 천자도 보고 기이하게 여겨 즉시 돌에 새겨 널리 전하게 했다고 알리고는, 또한 흰 비단에 글씨를 받아가지고 갔다. 이에 공의 예술이 해내(海內)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심경호 교수는 당시 명나라의 혼란스런 정국을 감안할 때 황제가 아니라 사신으로 왔던 조선 출신 환관 정선(鄭善, ?-1468)이 짐짓 지어낸 말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중국에 간 조선인들이 좋은 서예작품을 찾을 양이면 중국 사람들이 “당신네 나라에 최고의 서예가가 있는데 구태여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합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또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해서 조선으로 들여와서 보니 그것이 안평대군의 글씨였다고도 한다. 이상의 기록을 살펴보면 안평대군은 근대 이전 우리 민족의 예술가로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오른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사례다. 일부 학자들이 19세기 초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당대 세계 최고의 서예가였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완원(阮元, 1764-1849) 등 청나라의 몇몇 학자들이 젊은 추사의 잠재력을 높이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지, 안평대군의 경우처럼 명나라 황제가 인정하고, 시장에서 장서수집가들 사이에 최고의 작품으로 수집열풍이 불었던 정도까지 이르지는 못했었다. 물론 왕자 프리미엄이 일부 작용했겠지만, 안평이 당대 중화문화권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았음은 분명하다.
안평 시사(詩社)의 문우(文友)였던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그의 글씨를 “ 꽃같이 아름다운 글씨체 다함이 없고, 햇살이 내려쬐듯 신묘한 빛이 비추니 그 기이함 또한 많도다(美質揷花無盡態 神光射日更多奇).”라고 평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정두경(1597~1673)은 『동명집(東溟集)』에서 “명필의 족보를 보면 첫번째가 김생이고, 다음이 이암이며 그 다음이 안평대군 이용”이라 하여 각 왕조별 최고의 서예가를 나열하고, 안평대군이 조선조 최고의 명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손꼽을 정도다. 계유정란 직후 세조에 의해 조직적으로 압수-멸실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 최고의 그림으로 회자되는 안평의 꿈을 그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1447년)』에 씌여진 ‘도원기(桃園記)’와 안평대군이 주도하여 당대 문인 21명의 글을 모아놓은 『비해당 소상팔경시첩』 (보물 제1405호) 정도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조선 왕실 최고의 재사였으나, 가장 불행한 최후를 맞은 사람이다. 그는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다음날 아침 친형(수양대군)에 의해 구금되고, 이레 만에 교동도에서 36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당했다. 수양(首陽)은 안평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진귀한 고서화를 수장했던 무계정사는 불살라졌고, 만권의 서적을 소장했던 마포 한강변의 정자, 담담정(淡淡亭)은 신숙주에게 하사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행적은 당대에 세조와 그의 신료들에 의해 철저히 말살, 변조되었다. 안평대군의 글자를 바탕으로 주조한 ‘경오자(庚午字)’ 활자는 녹여서 ‘을해자(乙亥字)’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수양대군은 왜 자신의 친동생을 그토록 혹독하고 잔인하게 처형하고, 그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던 것인가? 수양은 매사에 야심만만한 왕자였지만 유독 1살 터울인 자기 동생 안평대군의 재기발랄함 앞에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느꼈고, 안평이 당대의 일류 문사들과 어울려 풍류행각을 하는 것이 마치 자기를 제외하고 천하를 재단하는 듯한 열등감 속에서 질시의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안평은 수양의 권력가도에서 제거되어야만 할 걸림돌일 뿐 아니라, 만인지상을 꿈꾸는 야심가인 수양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살려둘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가 동생 안평의 재주에 얼마나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지는 즉위 5년이 되던 해 삼촌인 양녕대군 앞에서 “나도 마음만 먹으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조의 측근들이 쓴 조선왕조실록에는 안평이 작당하여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려고 하였기에, 수양이 불가피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계유정변 다음날 어린 단종은 수양대군 일당의 위압에 휘둘려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발표한다. “간신 황보인과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 용(瑢)과 결탁하여 친당을 널리 심고, 중외에 거점을 분단하고는 죽을 각오의 무사들을 몰래 양성하고 변방의 무기를 몰래 들여와 불궤(不軌, 모반)를 도모하였다. 간당(奸黨, 간사한 무리)이 모두 복주(伏誅, 처형)되었으나 안평대군 용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인 까닭에 차마 국법을 시행할 수 없어서 외방에 두노라.” 안평이 강화도로 유배된 다음날부터 수양대군 일파가 사주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들이 땃벌떼처럼 일어나서 안평을 사사(賜死)할 것을 주청하고 나선다. 수양은 짐짓 안평을 보호하는 척하지만 결국 조정의 대세를 수용한다. 그리하여 안평은 일주일만에 교동도에서 사사된다. 10월 25일에는 안평대군 사사 후 흉흉해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안평대군 용(瑢)이 반역을 공모한 정황 수십가지를 나열한 교서를 의정부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1453년(계유년) 수양대군이 안평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그 정변(政變)도 나라의 난리를 평정한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미화시켜 부르게 된다.
조선에서 왕의 직계가족의 경우 본인은 처형당할지언정 그의 일족에게까지 여죄(餘罪)가 미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안평은 예외였다. 그의 후손들은 처형되고, 노비로 팔려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했다. 장남인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1439-1454)은 안평대군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진도(珍島)로 이배된 1년 후 목매달아 죽였고, 며느리와 손녀는 계유정난의 1등 공신 권람(權擥, 1416-1465)의 노비로 입적되어 천민처럼 성씨 없이 이름으로만 불리웠다. 며느리는 오대(五臺), 손녀는 무심(無心)이었다. 이렇게 안평대군의 혈족은 끊어지고 말았다. 손자 안평을 4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의 양자로 입적하여 그 혈손을 이으려던 태종의 의도도 좌절되었다. 계유정란의 주역들은 안평을 3살 때 입양하여 친어머니처럼 키운 성녕대군 군부인도 조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어처구니없는 불명예를 씌워 경주로 귀양을 보냈다. 안평대군은 무덤조차 없다. 심지어 세종이 생전에 성주 선석산(禪石山) 자락에 조성했던 태실도 세조 집권 후 단종, 금성대군의 태실과 더불어 파괴되었다. 로마시대의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과 유사하게 존재 자체를 부인한 것이다. 참으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지른 악당들이다.
안평대군은 과연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저 호방한 예술혼을 지닌 풍류남아였던가? 비록 안평이 조야에 두루 인간관계를 맺었다고는 하나, 과연 그가 정치적 야망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안평은 조정의 이름난 학자들을 자기 정자에 초청하여 여러 번 시회를 열었지만 찬상(讚賞)된 주제들이 주로 경승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뿐이다. 아마도 안평은 표제의 시처럼 자연 속에서 고금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한가한 인생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인왕산 계곡에 지은 무계정사(武溪精舍)나 마포 한강변에 지은 담담정(淡淡亭)은 모두 탈속적 취향을 표방하는 당호(堂號)를 걸었다. 수양과 달리 안평이 지은 시에서는 그의 권력욕이나 호연지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실려 있는 아래의 시처럼 그저 담백한 선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題閣老畵幅 (제각로화폭)
--- 재상의 화폭에 쓰다
萬疊靑山遠 (만첩청산원)
청산은 멀리 첩첩 펼쳐져 있고
三聞白屋貧 (삼문백옥빈)
소문대로 초라한 초가집엔 가난이 가득한데
竹林烏鵲晩 (죽림오작만)
대숲에 까마귀와 까치 우는 저녁
一犬吠貴人 (일견폐귀인)
한 마리 강아지 찾아오는 손님 반겨 짖네
반면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조언을 받아드려 무인들과 교분을 쌓고, 한강 하류의 궁산(宮山)에 올라 군사를 조련하면서 역모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평이 도성 외곽에 개인 정자를 두 개나 짓고, 당대 조정의 신료들을 자신의 풍류놀이에 동원하여 찬문을 짓게 하는 시회를 주최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권력의 사유화가 없지는 않았다. 이런 면에서 용재(傭齋) 성현(成俔, 1439-1504)의 어머니가 안평대군의 정자에 불려갔다 온 둘째 아들 성간(成侃, 1427-1456)을 나무라면서 “왕자의 도(道)는 문을 닫아 손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건만 어찌 대군께서는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반드시 패할 것이다. 너는 함께 어울리지 말거라.”고 한 혜안이 담긴 충고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평은 풍류인사였지만 여색을 탐하지는 않았다. 왕족치고는 결벽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본부인 외에 달리 첩실을 맞았다는 기록이 없다. 정부인과 슬하에 아들 둘만 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금슬(琴瑟)은 좋지 못했다. 차라리 냉냉한 사이였던 듯하다. 단종실록 6권의 "안평 대군의 부인 정씨의 졸기"에 보면 "용(瑢)이 박대(薄待)하여 서로 보지 아니한 것이 이미 7-8년이었다. 졸하게 되자 그 염(斂)하고 빈(殯)하는 여러 가지 일을 전혀 돌보지 아니하였고, 그 아들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또한 가서 보지 아니하니, 서인(庶人)의 죽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평을 처단한 수양대군 일파들이 기록한 실록이라서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겠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궁정법도에 어긋나고, 상식에 어긋난 가례(家禮)다. 안평은 가정에서 채울 수 없었던 허전함을 밖에서 풍류행각으로 채웠던 것일까? 그만큼 그는 정치인이 되기에는 너무 여리고, 너무 섬세한 어쩔 수 없는 한량이었다.
안평대군 집안의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1월 28일(음력 12월 19일) 차남 덕양군 우량(德陽君 友諒)이 병사하였다. 그리고 5월 31일(음력 4월 23일) 정부인 연일 정씨(迎日 鄭氏)도 죽었다. 상심한 그는 “불사(佛事)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공언하며 사찰에 공덕 드리는 것을 중단하였다. 그 해 11월 10일(음력 10월 10일) 계유정변(癸酉政變)이 발발하여 안평과 맏아들 우직이 강화도로 유배되고, 안평은 일주일만에 사사된다. 이 모든 일이 1453년 계유(癸酉)년 한 해만에 일어났다. 마치 저주받은 집안처럼 조선 최고의 재사이자 부귀영화의 정점에 있던 안평의 가문은 흔적도 없이 와해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36살, 맏아들의 나이 16살이었다.
안평(安平)은 세종이 축원하며 내려준 봉호(封號)처럼 ‘안온하고 평화롭게’ 생을 마치지 못했다. 격랑의 역사, 그 탐욕의 칼날에 희생양이 되었다. 1453년 11월 17일. 정확하게 570년 전, 이번 주의 일이다.
--- 2023년 11월 17일 作
그는 정치인이 되기에는 너무 여리고,
너무 섬세한 어쩔 수 없는 한량이었다.
표지 그림: 한라산인 -- Bing Image Creator 시작(試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