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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치멘탈 자니(8): 조지아

일흔번째 생일날

by 천산산인

2024년 11월 1일(목): 여행 제8일차

(조지아 바투미에서 쿠타이시를 거쳐 트빌리시로)


그렇게도 거부했건만,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잠재의식은 기억하는가부다. 문득 잠이 깨었다. 새벽 1시 반. 이젠 부인할 수 없는 만 70세 노인이 되었다. 아내와 딸이 잠에서 깰까봐 조용히 화장실로 가서 상념에 잠겼다. 내 인생 70년이 구름처럼, 물결처럼 흘러흘러 갔다. 그래도 돌아보니 감사한 나날들이다. 두어시간동안 화장실에 앉아서 몇가지 단상을 수첩에 끄적이다가 살그머니 잠자리로 돌아왔다.

07시 30분. 먼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호텔 뒷편에 보이던 Nuri호수로 산보하러 나섰다. 아침 날씨가 제법 차갑다. 아직 어둑해선지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다. 대신 큰 개들이 어슬렁거린다. 이 놈들이 공격적이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조지아 개들의 순한 심성을 믿어보기로 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호숫가를 걸었다. 이곳은 바투미판 석촌호수다. 본시 흑해로 들어가는 물이 고여있던 늪 지대였으나 1881년 러시아제국 시기 이 지역 총독의 제안으로 늪을 정비하여 호수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호수를 포함한 공원 전체면적이 20 헥타르(200,000㎡)이니 석촌호수공원(285,757㎡)보다 약간 적다. 게다가 석촌호수는 둘레길을 빼곤 대부분이 호수지만, 이 곳은 대부분이 육상공원이기에 실제 호수 면적은 석촌호수에 비해 훨씬 적은 곳이다. 이곳도 석촌호수처럼 둘레로 도심화가 진행되어 다양한 모습의 고층건물들로 둘러쌓인 도심 속 공원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물결모양 디자인의 매리옷호텔이 호수면에 투영되어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호수의 이름에는 슬픈 전설이 담겨 있다. 누리(Nuri)란 이름의 어린이가 늪가에서 놀다가 빠져서 익사하였고, 그녀의 엄마가 매일 호숫가에 나와서 통곡을 하였기에 그 늪의 이름이 누리겔리(Nuri Geli)라고 불렸다고 한다. 호수 주변의 육상공원은 지난 130년동안 여러 번 개명되었다. 1888년 러시아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여 ‘알렉산드로브(Alexandrov) 정원’으로 명명되었다가, 1933년에는 ‘어린이 공원’으로, 이후 아자라 지역 최초의 여성 비행기조종사의 동상을 건립하면서 ‘선구자의 공원’으로 불렸었고, 2006년 이래 독재자 Aslan Abashidze를 축출한 날을 기념하여 ‘5월 6일 공원(May 6 Park)’이 공식 명칭이 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바투미 중앙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다양한 디자인의 고층건물들의 그림자가 물구나무 서있는 데칼코마니의 기묘한 장면을 감상한 후, 해변 방향으로 다시 길을 건넜다.

힐튼호텔 부속 카지노 건물에 한자로 ‘도장(賭場)’이란 단어가 크게 써있다. 이 곳에서도 중국인들이 큰 고객인가부다. 도박장 옆에 푸른 색칠을 한 웅장한 4층 건물이 길게 뻗어 있다. 조지아의 세익스피어인 중세시인 Shota Rustaveli(1160-1220)의 이름이 헌정된 국립 바쿠미대학교다. 호텔이 즐비한 해변가, 그것도 카지노 바로 옆에 대학교가 있다니 우리나라 상식으론 이해가 안가는 입지다. 마치 부산대학교 교사가 해운대 해변가 호텔 틈새에 끼여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소위 ‘교육유해시설’만 제외하면 바투미대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캠퍼스를 가진 대학 중 하나다. 건물 남쪽으로 잘 가꾸어진 아열대식 정원과 낭만 가득한 몽돌 해변, 그 너머로 푸른 파도 넘실거리는 흑해가 펼쳐져 있으니... 독한 녀석들에게는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는 최고의 캠퍼스겠지만, 대부분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는 끓는 피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최악의 캠퍼스일 것 같다. 본관 건물 정면에 케이크를 연상시키는 5단의 둥근 분수대가 있고, 분수대 꼭대기에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레리나의 자그마한 조각상이 얹어져 있다. 해변가 공원은 다시 살펴봐도 명품이다. 어린이 놀이시설의 화려함과 크기도 여느 선진국의 수준을 능가한다. 도무지 예상 밖의 풍요로움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도시다. 아무튼 바투미, 쌀벌레인 바구미를 연상시키는 하찮게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여러모로 살펴봐도 정말 놀라운 도시다.

1시간여 산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당초에는 잠시나마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자는 묵직한 화두를 안고 나선 산보 길이었다. 그러나 호수에 비친 고층건물의 경관에 홀려 어느덧 상념은 사라지고 물욕 가득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한국과는 5시간 시차니, 벌써 칠순 생일축하 메시지가 여럿 올라와있다. 나갔다 왔으면 이제 아침밥 먹으러 가야지 다시 침대에 벌렁 누운 채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카톡질하고 있는 영감의 모습에 심기가 뒤틀린 마누라의 불호령이 어김없이 떨어진다. 아~ 센티멘탈 쟈니여... 힘없는 영감이 할 수 있는 저항은 불평뿐이다. “거참 마누라쟁이, 오늘은 좀 봐주지, 칠순 생일날 아침까지도 또 잔소리를...” 투덜거리며 일어서서 주섬주섬 차려입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어제처럼 느긋하고 풍성하게 아침 뷔페를 즐겼다. 언제 또 이렇게 먹으랴 싶게... 그리고 흑해변의 아름다운 도시 바투미를 떠났다.

엊그제 오후에 왔던 그 길을, 오늘 오전에 정확하게 되돌아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면서 저 아래로 흑해가 흘끗흘끗 바라보이는가 싶던 길은 다시 평화로운 그러나 빈곤이 깃든 농촌 풍경으로 바뀌었다. 1시간 반 쯤 천천히 달려서 쿠타이시 외곽에 도달했다. 도시 변두리의 낡은 집들을 끼고 산길을 기웃기웃 돌아 오르자 저 아래 거창한 건물의 낡은 교회가 버티고 있다. 바그라티(Bagrati) 대성당이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나즈막한 돌담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걸어갔다. 손가락으로 찌르면 푸른 물이 쏟아질 것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날. 여행 중 마주친 가장 삽상한 날씨다. 조지아 양식의 돔(cupola)이 남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연갈색 사암벽돌로 쌓아 올린 상당히 큰 교회다. 교회는 조지아를 통일한 국왕 바그라티 3세(960-1014)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통일 왕조의 수도이자,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최고의 교회를 건립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자 했다. 역사의 굴곡점마다 발견되는 독재자의 허영이다. 북쪽 벽에서 발견된 새김글에 따르면 이 교회는 서기 1003년에 바닥을 깔았다고 하니 건축 시점이 1,000년이 넘은 오래된 교회다. 대성당은 천년고도 쿠타이시를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 건립되어 있다. 소위 ‘조지아 황금기’ 통일왕조 수도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최고의 기술자와 건축자재를 동원하여 화려하게 건설하였기에 조지아 교회건축물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건물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였던 William Lethaby(1857-1931)는 이 교회를 조지아 건축물 중 가장 훌륭한 걸작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대성당은 1692년 오토만제국이 이 지역의 이메라티(Imerati)왕국을 침공하면서 오토만 군대의 포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너희들의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을 것이다. 경내에 군데군데 엄청 큰 돌기둥의 잔해가 널려 있다. 어떤 것은 직경이 2m가 넘어 보이고, 아주 정교한 포도나무 문양 조각이 새겨져 있다.

잔해만 남았던 대성당은 1950년대부터 조금씩 복원되기 시작하였고, 2012년에 현 상태로 마무리 지었다. 복원책임자였던 이태리 건축가 Andrea Bruno는 완전히 붕괴된 성당의 북쪽 사면을 원래와 같은 벽돌이나 석재로 복원하는 대신 철근빔과 강화유리창을 사용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보전하였다. Bruno는 그 공로로 조지아정부로부터 황금장 훈장을 수여 받고 국제적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복원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문제는 1994년에 UNESCO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던 성당인데, 복원과정에서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판정되어 UNESCO가 2017년에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철회해 버렸다는 점이다. 유적을 바라보는 복원과 보전 사이의 우선순위의 차이가 불러일으킨 가치관 갈등이다. 조지아의 성당답게 이 곳에도 어김없이 나무십자가가 있고,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이태리 토리노대성당에 있는 예수님을 감쌌던 세마포가 이 곳에도 전시되어 있었다. 동방정교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성상들을 모아놓은 나무 병풍같은 성장(聖障, iconostasis)이 화려한 색조를 뽐내고 있다. 아내와 딸은 오늘도 어김없이 제단 위에 촛불을 밝히고 경건히 기도하였다. 넓은 잔디밭은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 명소로 우리가 방문한 날도 하얀 드레스와 하얀 정장을 입은 신혼커플이 고색창연한 성당을 배경으로 인생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의 지시로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성당 아래쪽 공터에는 아주 인상적으로 크고 잘 생긴 레바논 삼나무 아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수십명이 모여서 해설을 듣곤, 교회구경을 하러 계단을 오르고 있다. 얼마나 잘 자란 나무인지 The Giant Cedar Tree라고 부르고 있었다. 저 언덕 아래로 쿠타이시 시내와 그 중심을 흐르는 리오니강 줄기가 가물가물 반짝이고 있다. 우리 차를 주차해 놓은 돌담 위에는 새까만 털의 강아지 한 마리가 순한 눈빛으로 앉아 있고, 그 너머로 듬성듬성 남은 까치밥 감이 푸른 하늘에 빨갛게 드리우고 있다. 화평하고 아름다운 푸르른 가을날이다.

시내 방향으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리오니강을 따라 숲 덤불 사이사이로 멋진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했다. 사령관은 시내로 들어가는 대신 다시 동북쪽 외곽지대로 차를 몬다. 산길을 따라 6km쯤 올라가서 못사메타(Motsameta) 수도원의 표지판이 보인다. 수도원은 주차장에서약 500m 정도 완만한 산길을 내려간 곳에 있었다. 멀리 수도원의 뾰쪽지붕들이 보이고, 리오니강의 지류인 츠칼츠텔라(Tskaltsitela)강의 새파란 물줄기가 보이는 계곡을 바라보면서 걷는 상쾌한 산책길이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던 순한 눈빛의 검둥이가 우리 뒤를 졸졸 뒤따라온다. 자식같이 키우는 멍멍이를 서울 집에 두고 온 사령관은 강아지만 보면 귀여워 어쩔 줄 모른다. 배고파서 깡총거리는 녀석에게 나눠줄 음식이 없어서 안타깝다. 수도원은 물줄기가 돌아서 형성된 가파른 계곡 위에 세워져 있었다. 계곡 넘어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사방을 가리고 있어서 속세와는 절연된 장소다. 정문 안에서도 본당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법 깊은 계곡 위에 아치형 지붕을 얹은 나무다리를 건너야했다. 멀리서는 세 개의 삼각형 돔이 겹치는 지붕 곡선이 제법 웅장해 보였었는데, 막상 가까이 와보니 너무 낡아서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못사메타(Motsameta) 수도원이란 이름은 ‘순교자들의 땅’이란 뜻이라고 한다. 730년경 아랍인들이 조지아를 침공했을 당시 기독교도 저항군을 이끌던 아르그베티(Argveti) 공국의 데이비드(David)와 콘스탄틴(Constantine) 형제 왕자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회유를 거부하고 순교 당했고, 그들의 시체는 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강이 핏빛으로 변하자, 이후 그 강의 이름을 ‘붉은 강’이란 뜻의 ‘츠칼츠텔라(Tskaltsitela)’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수도원은 10세기에 바그라트 3세의 지시로 지었다고 한다. 고립된 터에 지은 수도원이니 교회 본당도 자그마했다. 그래도 내부는 화려했다. 높은 돔(cupola) 천장이 훤하게 틔어 있고, 정확하게 아치형으로 파인 사방벽이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의 표지화면처럼) 벽면의 조각과 포도줄기를 형상화한 문양도 놀랍도록 정교했다. 다만 쿠폴라의 천정벽화는 최근에 다시 그린 것처럼 깨끗했지만 전문가가 그리지 않은 것처럼 조악했다. 이렇게 성의없는 천정화를 가진 예배당을 본 적이 있나 싶게 엉성했다.

출입금지 구역 안 긴 의자에 턱수염을 기르고 검은 사제복을 입은 조지아정교회 수도사 두 분이 앉아 계신다. 개인적 편견이겠지만 경건하다기 보단 무료함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흐트러진 모습들이다. 조지아 뿐 아니고 내가 마주친 대부분의 정교회 사제들은 잘 먹어서 혈색이 좋고 턱수염이 건장한 덩치 큰 사내들이라서인지 도무지 거룩함을 읽을 수 없었다. 종교가 사양산업화된 고도대중소비사회에서 2,000년 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만큼 물질과 정신의 괴리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사는 분들이 있을까 싶다. 수도원 중앙정원엔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우물이 있다. 저 아래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올리는 깊은 우물이다. 아내가 한참을 낑낑 거려 물 한바가지를 길어 올려서 다 같이 시음하고 손도 씻었다. 청정계곡의 물이니 시원하고 부드럽다. 수도원과 계곡을 연결하는 아치형 다리 아래를 3번 기어가면서 빌면 순교자 데이비드와 콘스탄틴 왕자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저 흘끗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수도원 밖으로 나오니 아까 따라왔던 강아지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우리 뒤를 반갑게 따라 나선다. 오던 길을 반쯤 따라와도 아무 음식을 얻어먹지 못하니 저 앞에서 큰 배낭을 메고 혼자서 씩씩하게 걸어오는 서양여성을 뒤따라 돌아간다. 차에 가면 나눠줄 음식이 있는데 비스켓 한조각도 건네지 못하고 헤어져서 너무 미안했다. 주차장으로 나오자 언덕 위 숲속에서 남녀 열대여섯명의 학생들이 자그마한 기타같이 생긴 3줄 현악기, 판두리(Panduri)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국에선 우리 세대들조차 북치고 장구치고 민요 부르며 놀아 본 기억이 없는 오래 전에 사라진 전통인데, 조지아에서 발견한 참 아름다운 장면이다.


오던 길을 되돌아 나오다가 북쪽 산길로 다시 올라가니 젤라티(Gelati)수도원이 나온다. 이 곳은 스베티츠코벨리성당, 오전에 방문했던 바그라티 대성당과 더불어 소위 조지아 정교회의 ‘Big Four’ 성당중 하나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명한 성당이다. 그래선지 성당 앞 산골마을까지 쿠타이시 시내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못사메타수도원의 전설에서 나오는 데이비드와 콘스탄틴 왕자의 사체를 사자가 물고 가서 언덕 위에 두었는데, 후일 조지아정교회에서 이 형제를 성인으로 추대했고, 1106년 조지아의 왕인 데이비드4세의 명에 의해 그 자리에 젤라티 수도원을 건립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청기와를 올린 둥근 뾰쪽 지붕 두 개가 푸르른 숲 위, 파아란 가을하늘 위로 솟아 있고, 그 아래 연갈색 사암벽돌이 오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도원의 외양은 멀리서 봐도 완벽한 균형미의 우아함이 느껴졌다. 얼른 달려가서 보고 싶으나, 대대적으로 내부 복원중이라서 수년 째 참배객, 관광객 일체를 받지 않고 있다고 한다. 수도원은 설립 당시 비잔틴제국의 학문중심지 중 하나로 ‘젤라티 아카데미’로도 불렸었고, 조지아정교회 성당 중 가장 수려한 성화와 모자이크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던데 들어가 볼 수 없으니 안타까움만 더했다. 성당의 공식명칭은 ‘축복받은 성녀 마리아 교회(Church of Virgin Mary the Blessed)’이고, 성경 속 다윗왕의 직계 혈통임을 자랑하던 조지아 황금기 바그라티 왕가의 제왕들과 이메라티왕국 지배자들의 무덤 수십기가 성당 바닥에 묻혀 있다고 한다. 하릴없이 높이 둘러친 돌담을 따라 수도원 주변을 걷고,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내부 공사중인 성당을 기웃거렸다. 돌담 가까이 수도원 외벽에 노출된 금빛 성화를 발견하곤 카메라 줌을 당겨서 정성껏 찍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비잔틴 양식의 금빛 모자이크 성화다. 신격화하기 위해 신체비율을 왜곡시키거나, 어색할만큼 과장된 신성한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저 온화한 여염집 여인이 아들을 안고 있는 담자한 미소가 담겨 있는 그림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과연 아름답다. 성전 외벽의 자그만 성화가 이럴 지경이니, 성전 내부 성화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어떠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아쉬움만 컸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신진대사를 촉진하는지 이제 몹시 배가 고프다. 이럴 땐 맛집을 찾아가는 것도 귀찮다. 몇일 전 시내 중심부를 차로 지나가며 “여기도 맥도날드가 있네?”했던 기억이 났는지, 사령관이 “점심 맥도날드 어때?“하고 묻는다. 여행 8일차, 한번쯤은 정크 푸드로 입맛을 돋우어줄 때가 되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 시내로 차를 몰았다. 쿠타이시 최중심부 광장엔 재미있는 분수대가 있다. 양, 코끼리, 사슴 등 30여 마리의 장난감 동물들로 채워져 있고, 최상층 기단에 갑옷으로 장식을 두른 두 마리의 말이 서 있는 분수대다. 쿠타이시판 브레멘합창단인가? 장난감 분수대인가? 싶은데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 왕국 콜키스(Colchis)의 황금 장신구 유물을 수백배 확대하여 설치해 놓은 것이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2012년 만들어진 직후부터 쿠타이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된 콜키스 분수다. 맥도날드는 그 분수대 광장 언저리에 있다. 시내 중심부도 주차장이 심히 부족하여 골목길을 기웃거리다가 광장을 빙 돌아서 다른 길로 들어서서야 겨우 빈 주차구역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웅장한 오페라극장 앞을 가로질러서 맥도날드로 들어섰다. 역시 후진국답게 맥도날드는 이 지역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이다. 시내 최중심부의 모던한 유리창 건물, 아메리칸 팝송이 흘러나오는 식당에서 예쁜 옷을 차려입은 멋쟁이 아가씨들이 햄버거에 빨대를 꽂은 콜라를 자랑스럽게 마시고 있다. ”미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개탄했던 80년대 초 종로, 이태원, 압구정에 최초의 맥도날드와 피자헛이 들어섰을 때의 우리나라와 똑 같은 풍경이다. 우린 비록 남루한 행색의 여행자들이지만, 쿠타이시 부잣집 가족들의 외식처럼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라스 자리에 기품(?) 있게 앉아서 햄버거 세트를 맛있게 먹었다. 이쯤이면 맥도날드라곤 구경도 못하는 산골국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촌사람들이 조지아식 상류층 문화에 편승한 셈이다. 가을햇살을 즐기며 천천히 식사를 마친 후 16시 30분경 쿠타이시를 떠났다.

딸과 아내는 앞자리에 앉아서 다정하게 얘길 나누며 운전하고, 나는 땀이 배어 눅눅해진 상처부위를 통풍시키며 가보잔 취지로 뒷자리에서 한동안 웃통 벗고 햇볕을 쬐었다. 누가 유심히 살폈더라면 역시 민도(民度) 낮은 중국인 관광객들이라고 혀를 찼을 것 같다. 아내와 딸은 저런 것도 이야기 거리가 되나 싶은 시시콜콜한 소재들을 서로 맞장구치면서 다정스레 얘길 나눈다. 늙은 어미에겐 딸이 보배다. 내가 조금이라도 끼어들 양이면 대화 분위기가 금새 싸늘해지니, 나는 그냥 못들은 척하고 멍청한 체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아빠나 남편을 힐긋 바라보곤 곧 바로 잔소리 합주가 쏟아진다. 모녀관계는 참 특이하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강고한 유대관계 앞에서 아빠는 숙명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18세기형 가장에겐 권위마저도 사치품이다.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다가 불화만 일으키고 또 다른 좌절을 맛보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외로움과 소외에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30년전엔 두뺨이 새빨갛게 뛰어놀면서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렸다가, 멀리서부터 달려와서 안기곤, 아빠가 공중으로 던지면 두 팔 벌리고 “오잉~”하고 활짝 웃던 어린 녀석이, 이젠 장성하여 아빠에게 마구 잔소리를 퍼붓는 아줌마가 되었으니, 세월 참 빠르다. 그만큼 내 얼굴엔 70년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으리라. 홀로 감상에 젖은 채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노랫말을 조용히 웅얼거려 본다. “태양은 뜨고, 태양은 지고.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가네...“


“Is this the little girl I carried,

Is this the little boy at play?

I don't remember growing older, When did they?

When did she get to be a beauty,

When did he grow to be so tall?

Wasn't it yesterday when they were small? ...

Sunrise, sunset, Sunrise, sunset,

Swiftly flow the days....“


https://youtu.be/gDqc-eyloho?si=U_9dAZV0pjJ4fTwh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휩싸인 채로 트빌리시로 가는 E60 고속도로를 달렸다. 트랜스 코카서스 산맥의 설산준령들이 오후 햇살을 비껴 받아 조금씩 붉어질 무렵, 고속도로는 크게 우회전하여 남쪽으로 향하고, 어스름 밤 기운이 도시를 뒤덮을 때 쯤 우린 트빌리시 외곽에 도착했다. 여기도 교통체증이 대단하다. 큰 도로 가득, 퇴근길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부시다. 달리는지 기는지 분간이 가지 않게 서서히 도심을 향해 나아갔다. 역시 수도는 다르다. 높은 건물과 훤하게 불빛을 밝힌 자동차 매장, 주유소, 슈퍼마켓이 줄지어 서있다. 비슈케크에서 온 촌놈 일행들의 눈이 휘둥글어질 만큼 훨씬 밝고 풍요로운 도시다. 예정보다 훨씬 늦은 저녁 8시경이 다 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앰버사도리(Ambassadori)호텔은 트빌리시를 관통하는 쿠라(Kura) 강변 도시고속도로 우측, 구도심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래된 식민시대의 건물을 완전히 새로 개조하여 큰 카지노와 객실 121개만 갖고 있는 품격있는 5성급 호텔이다. “뭐한다고 이런데 돈을 쓰나?” 싶어서 속은 쓰리지만 “와~ 우리 딸이 아빠를 위해서 또 다시 엄청난 호텔을 마련했구나.”라고 덕담을 던지고 로비로 들어섰다. 이 호텔은 엄청나게 넓고 화려한 로비부터 초라한 행색의 여행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리셉션 옆으론 카지노로 내려가는 화려한 계단이 있고, 검은 색 정장 차림에 엄청나게 덩치 큰 사내가 정중하지만 매서운 눈길로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투숙객, 손님은 왕이다. 그것도 선진국 대한민국 손님들인데... 꼿꼿이 허리를 펴고, 낡은 캐리어를 끌며 뚜벅뚜벅 리셉션으로 가서 머리칼 한오라기 흩틀어지지 않게 도도한 차림으로 투숙객을 맞는 금발의 미녀 직원에게 당당하게 대한민국 여권을 내밀었다. 무표정했던 미녀의 얼굴에 상냥한 미소가 번졌다. 금줄 달린 근무복을 입고 대기하고 서있던 인도인 쿠리어가 금장한 카트에 우리 짐을 싣고 방으로 안내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복도도 값비싼 양탄자와 검정색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고, 복도를 바라보는 큰 거울 앞 탁자 위에 이집트 부장품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듯 금색도장의 화려한 스탠드가 마호가니 콘솔 탁자 위에서 간접조명을 비추고 있다. 비까번쩍한 호텔이다. 간단히 팁을 건네고 멋진 방으로 들어서니 여기도 생일축하 조각케잌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 이 호텔에서는 진짜로 생일을 맞으니 옹색하게 받아먹지 않아도 된다.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로공원에 실물 크기의 군무(群舞)상 조각이 야간조명에 비쳐 더욱 역동적으로 보인다. 호텔 뒷길도 꽤나 유명한 관광루트다. 대략 짐정리를 마치고 밤거리로 나섰다.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오래된 교회 첨탑과 색감이 살아있는 벽화를 기웃거리며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트빌리시의 명물이라는 천사시계는 호텔 벽에 붙어있다시피 가깝다. 9시 정시를 방금 지난 시간이기에 다음 정시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길다. 시계탑 옆의 Gabriadze Cafe로 들어갔다. 유명관광 명소 옆 식당이라선지 빈 좌석이 거의 없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리모델링을 잘했고, 인테리어 소품들을 잘 배치하여 내부 공간은 예술적이다. 창가 좌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보다 정확하겐 우리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겠지만) 하우스 와인 한잔에 간단한 안주 두개를 시켜 나눠 마시며 트빌리시 입성과 칠순생일을 자축하였다. 오늘은 삼시 세끼를 다 잘 먹었으니 이만하면 멋진 생일날이다.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내 인생, 70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이 공허함은 어인 일인가? 70대의 첫날밤, 천년고도의 향훈이 배어있는 트빌리시의 밤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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