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동지(驚天動地)의 날
키르기스스탄에 온 지 정확하게 1년이 된 날이다. 큰 울림과 함께 이 나라를 찾았다. 비슈케크 마나스공항에 막 착륙한 01시 30분, 천산산맥 동쪽에서 발생한 진도 7.3의 큰 지진으로 키르기스스탄 전역이 흔들렸다. 경천동지(驚天動地). 뭔가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이 고무되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지난 1년간의 키르기스스탄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감사한 나날들이었지만, 당초에 기대했던 큰 울림은 만들지 못했다. 새로 시작하는 1년을 기약해 봐야겠다. 침대에 누워 망설였다. 현재 기온 영하 12도. 스스로 설정한 야외운동의 마지노선인 영하 10도 보다도 더 춥다. 그런데 멀리 지평선의 불빛이 아롱거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대형 국기가 70도 각도로 펼쳐져서 바람에 차르르 흔들리고 있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가 흐르고 있단 표시다. 그래 얼마나 오랜만인가? 심호흡을 할 수 있는 날이다. 어스름 여명이 밝아올 무렵인 7시 50분. 주섬주섬 옷을 차려 입고 밖으로 나섰다. 역시 싸늘하다.
어제 내린 눈으로 에르킨딕 가로공원은 잔디 위로, 나뭇가지 위로 흰눈이 소복이 쌓여 제법 멋진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공원길은 벌써 사람들이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치워져 있다. 저 앞에서 초록색 제복에 은색 야광띠를 두른 청소부가 빗자루와 쇠삽을 들고 열심히 눈과 얼음을 걷어내고 있다. 그냥 놔두면 낮동안에 웬만큼 녹아 내릴텐데 무얼 그리 열심히 긁어내리시는지 쨍쨍 울리는 소리가 인적 드문 새벽 공원길에 울려 퍼지고 있다. 쭈그리고 얼음을 걷어내는 이는 중년의 아주머님이시다. ‘감사합니다가 뭐더라?‘ 입에서 웅얼거리다가 가까이 지나치면서 “총 라흐맛!”하곤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갔다. 뒤에서 뭔가 말소리가 들린다. “0?0?0?” 알아듣진 못하지만 뭔가 다정한 어투다. 갑자기 내 몸속에서 따스한 온기가 솟아오른다. 그래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공간이 누군가의 땀과 노력에 의해 유지-관리되고 있다. 우린 이 평범한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저 분도 나처럼 따스한 온기가 솟아올랐으리라. 감사하기,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첫 번째 방법이다.
오전에 근무처(Academy)에 갔다가 점심 먹으러 집으로 오는 길. 백양목 가지 위로 보이는 눈 그친 하늘이 파랗다. 날은 쌀쌀하지만 화창한 겨울날이다. 1층을 비워놓는 이곳 아파트의 현관은 지나치게 넓고 컴컴하다. 밝은 태양에 부셨던 눈이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서자 앞이 침침해진다. 바닥이 깨끗하게 물걸레질 되어 있다. 한걸음 내달으니 일주일 전 새로 산 내 통굽 신발의 발자국이 복도 바닥에 선명하게 찍힌다. 아차! 달나라에 처음 디딘 암스트롱의 발자국도 아니고 이게 뭐람. 얼른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발판 위에서 신발을 쓱쓱 문질렀다. 계단 옆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히잡을 쓴 앳된 소녀가 버킷에서 걸레를 빨고 있다. 찬물에 젖은 자그마한 손 등이 빨갛게 달아있다. 멋쩍게 여러 번 더 신발바닥을 문질렀다. 그리고 새 댁 대청마루 건너듯 뒤축을 들고 살며시 걸어서 들어갔다. 그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깨끗한 환경이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미안해하기.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두 번째 방법이다.
밤 9시. 한국에서 출장 온 젊은 교수들과 맥주 한잔씩 나눴다. 후진국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 웬 5성급 호텔에서 머무는지... 암튼 하이얏트 호텔 로비 바에서 만났다. 몇가지 의견을 나누고 얘기하다 보니, 나도 눈치 없이 점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꼰대 무용담이 나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지루해하기 직전에 얘기를 마치고 일어섰다. 눈 내린 밤길을 홀로 걷는 것은 제법 낭만적이다. 늦은 밤길에 인적 드문 공원길을 외투로 감싸고 조심조심 20분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슈퍼를 지나치는데 웬 남녀가 서 있다가 내게 뭐라고 말을 건넨다. “0?0?0?” 한 해가 지나도 아직도 귀머거리+벙어리인 내가 알아들을 재간이 있나? 아파트 출입구로 돌아 들어가다가 힐끈 돌아보니 흰 지팡이가 눈에 들어온다. 남편이 장님인 부부 혹은 부녀인 듯하다. 아파트 마당에서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특급호텔에서 선진국 교수님들께 술 한잔 사는 것을 마다치 않는 녀석이 이 늦은 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에게 어찌 박절하게 돌아설 수 있단 말인가? 수첩을 뒤적여 200솜(약 3,000원) 지폐를 꺼내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귀가하려는 듯 돌아서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지폐를 건넸다. 부족하지만 슈퍼에서 도시락 한끼는 살 수 있는 돈이다. 알량한 소액 지폐 한 장. 내 그릇이 이것 밖에 안되니 부끄럽지만, 겨우 미안함을 달랠 수 있었다. 그래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불우한 이웃들이 계시다. 나누기.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세 번째 방법이다.
D+365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고, 작은 실천을 할 수 있었던 날이다. 거창하게 대통령을 만나서 일장 훈시를 하는 것이 경천동지(驚天動地)가 아니고, 이렇게 쌓인 작은 실천이 이 나라를 울리는 올바른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흰눈이 소복히 쌓인 감사한 날이다.
--- 2025년 1월 23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