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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산인 Sep 23. 2024

한가함 그 맛을 아시나니

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44)


한가함 찾아, 한가함 얻어서, 한가함 그 맛을 아시나니

< 雙明亭 (쌍명정) >

        ---  “쌍명정에서     


 謂公巢許寓城郭 (위공소허우성곽)

      공을 소부와 허유와 같은 은사라 일컫자니 성안에 살고 계시고

 謂公虁龍愛林壑 (위공기룡애림학)

      공을 기룡같은 빼어난 재상이라 일컫자니 산천을 너무 사랑하시네

 千金買斷數畝陰 (천금매단수무음)

      천금을 주고 여러 이랑의 땅을 사기로 결단하고

 碧瓦朱欄開小閣 (벽와주란개소각)

      푸른 기와 붉은 난간 갖춘 작은 집을 지으셨군요   

  

 淸風冷冷午枕凉 (청풍냉냉오침량)

      맑은 바람 선선하니 낮잠도 시원하고

 蒼雲陣陣空庭落 (창운진진공정락)

      푸른 하늘의 구름은 두둥실 집 뜰에 드리우니

 求閑得閑識閑味 (구한득한식한미)

      한가함 찾아, 한가함 얻어서, 한가함 그 맛을 아시나니

 舊遊不夢翻階藥 (구유불몽번계약)

      어릴 적 돌계단에서 쑥 뒤집으며 놀던 꿈을 꾸지 않으실까요?    

  

  초가을이다. 집안의 사백(舍伯)께서 도성 북쪽에 새로 지은 서재로 초대해 주셨다. 당호(堂號)가 ‘쌍명재’다. 연전에 주상전하께서 내게 하사한 시호이기도 하지만, 집 주인의 밝은 두 눈빛을 빗대어 ‘쌍명(雙明)’으로 편액(扁額)을 쓰셨다고 한다. 붉은 난간 위에 푸른 기와를 얹은 담자한 정자다. 난간 위로 오르니 선선한 바람결에 스르르 잠에 빠져든다. 누워서 하늘을 보니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떠가고, 그 그림자가 정자 앞뜰에 드리워져 마치 구름이 내려앉을 듯 포근한 느낌이다. 사형(舍兄)께선 일찍이 관직을 벗으면 나와 더불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은둔하자시더니, 그게 어찌 쉬운 일이랴... 결국 이 정자를 짓고 세속에서 은거하는 중은(中隱)의 길을 택하셨구나. 이제 근교에 정자를 지었으니 속세의 번잡함을 벗어나서 한미함을 즐기고, 어릴 적 섬돌 사이로 삐져나온 쑥약초를 뽑아내던 순진함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렇듯 평화롭고 한가로운 정자는 만금(萬金)을 들인다 한들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집 주인의 고매한 인품이 묻어나야만 한다. 최태위 어르신과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9분의 기로회(耆老會) 회원들은 한결같이 국사에 매진하여 현달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세속을 떠나 살고자하는 자하상(紫霞想)을 꿈꾸어 오신 분들이다. 그래 나도 이 선배님들의 아름다운 풍모를 닮아야겠다.


  이 글은 고려 중기의 위대한 시인인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작품이다. 그가 사형(舍兄)인 태위(太衛) 최당(崔讜)의 신축 정자에서 열린 기로회 모임에 초대 받아가서 지은 시다. 이 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에서 인용된 몇가지 역사적 사실, 즉 용사(用事)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우선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고사다. 상고시대 요(堯) 임금이 자신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려 달라고 허유(許由)를 찾아가서 부탁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 기산으로 은거했다. 또 사람을 보내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근처의 냇가로 가서 귀를 씻었다. 마침 물을 먹이려 소를 몰고 오던 친구 소부(巢父)가 허유에게 연유를 묻고는 소를 상류로 몰고 가서 더럽혀지지 않은 물을 먹였다는 고사다. 이후 허유와 소부는 동양사회에서 권력을 초개같이 아는 은둔선비의 전형이 되었다. 제2행의 기룡(夔龍)은 궁궐을 지키는 외발 용이지만 여기선 순(舜) 임금 곁을 떠나지 않았던 충성스런 두 신하를 일컫는다.


 쌍명정 정자의 주인인 최당(崔讜, 1135-1211)은 오랜 기간의 관직생활을 거치고 1199년 (신종 2년) ‘수태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로 치사(致仕, 명예퇴직)하였다.. 태위(太衛)란 직책은 주로 왕의 고문역할을 담당하던 정일품 품계로 고려시대 삼공(三公: 太衛, 司徒, 司空)의 하나로 최고의 명예직이다. 관직을 물러난 후 최당은 도성 북녘에 집을 짓고 그 서재에 ‘쌍명재’란 편액을 걸었다. 『동문선』 권65에 수록된 이인로의 <쌍명재기 雙明齋記>에 따르면, 쌍명이란 최당의 밝은 두 눈빛을 형용하여 장자발(張自拔)의 발의에 따라 붙여진 당호(堂號)라는 것이다. 그를 비롯하여 동생인 수태부(守太傅) 최선, 태복경(太僕卿) 장자목 등 9명이 당(唐)나라 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를 모방하여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를 조직하여 시와 술로써 소일하니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살아있는 신선들’이라는 의미로 ‘지상선(地上仙)’이라고 불렀다. 이 분들의 풍류가 얼마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던지 돌아가신지 100여년이 지나서도 고려 후기의 문신인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이 “최태위모설유성북추암(崔太尉冒雪游城北皺岩)”이란 시에서 벚들과 함께 눈을 맞으며 개성 북쪽의 추암에서 놀았던 최태위의 풍류를 찬상(讚賞)하고 있고, 같은 시기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이 풍류를 ‘동국사영(東國四詠)’, 즉 "동국(고려)의 네가지 노래"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200여년이 지난 조선 초기에도 권근(權近, 1352-1409)이 “김거사설중기우유추암(金居士雪中騎牛遊皺岩)”이란 시를 지어서 최태위의 풍류를 인용한 바 있다.


  이 시의 저자인 이인로는 고려왕조 초기 큰 족벌을 형성하였던 인주 이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인 이오(李䫨)는 재상급인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분이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불확실한 것을 보면 그가 태어나기 전 3대에 걸쳐서는 큰 벼슬에 오르지 못한 집안으로 추정된다. 그와 어린 동생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나, 큰아저씨인 화엄승통(華嚴僧統, 화엄종의 최고위직 승려) 요일(寥一)이 흥왕사(興王寺)에서 그들을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요일은 두 조카를 항상 좌우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고 열심히 가르쳐서 삼분(三墳), 오전(五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기서 삼분(三墳)은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 삼황(三皇)시대의 글을 지칭하는 것이고, 오전(五典)은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요(唐堯)·우순(虞舜)의 오제(五帝) 시대의 책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1170년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신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자 그는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다섯 해를 숨어 지내면서 정세를 관망한다. 1175년(명종 5) 환속한 후 그해 여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여 다시 5년 동안 태학에서 수학한다. 그동안 국자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실력을 겨루는 고예시(考藝試)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경대승(慶大升) 집권기인 1180년(명종 10) 과시에서 장원급제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31세 때인 1182년 장인인 최영유(崔永濡)가 금(金)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가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연도(燕都, 북경)에 들어가 정월 초하룻날에 관문(館門)의 제액(題額)으로 다음과 같은 춘첩자(春帖子)를 써붙였다.    

    

 翠眉嬌展街頭柳 (취미교전가두류)

    길섶 버들은 푸른 눈썹처럼 곱게 드리우고

 白雪香飄嶺上梅 (백설향표영상매)

    고개 위 매화는 백설처럼 향기를 날리는데

 春風先自海東來 (춘풍선자해동래)

     봄바람 먼저 바다 건너 동쪽에서 스스로 불어오니

 千里家園知好在 (천리가원지호재)

     천리 밖 고향 집이 편안히 있는 줄 알겠구나.


  이 글을 써 붙인 후 그의 이름이 중원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 후 중국의 학사들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이 시를 외우면서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위의 시는 파한집에는 3행과 4행이 뒤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글의 맥락상, 그리고 각운의 조율상 3행과 4행을 뒤바꾸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어 현재의 시로 게재하였다.)  

  이인로는 이듬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후, 당대 문사인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뱃속에 수많은 시 구절을 품고 있다”는 뜻을 가진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명종대 어느 정월 대보름 밤 이인로가 옥당(玉堂)에 입시(入侍, 대궐에 들어가서 왕을 알현)했을 때 명종은 한림원에 명하여 등룡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 때 이인로가 지은 시에 흡족하여 상을 주시고 시의 마지막 구절인 “欲助重瞳日月明 (욕조중동일월명, '주상 전하의 용안을 더욱 밝히는 일을 돕고 싶습니다')”에서 일월명의 뜻을 취하여 ‘쌍명(雙明)’이란 호를 내렸다. 이후 그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 비서감간의대부(秘書監諫議大夫)를 역임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재사임에도 더 이상의 요직에는 중용되지 못했다.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소속의 정4품직으로,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담당하는 낭사(郞舍)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였다. 이인로가 활동하던 시절은 무신들이 활개를 치고, 한창 권력다툼을 벌이던 시절이었기에 문신들은 핍박받고 소외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의 양부(養父)인 요일(寥一)이 당시 집권자인 최충헌을 모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도 개경의 흥왕사에서 고령의 반룡사(盤龍寺)로 쫓겨 내려갔기에 그는 무신정권에서 중용되기 힘든 소위, 불순분자였다. 그의 아들 세황(世黃)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나이 향년 69세로 고종7년(1220년)에 개경 홍도정제(紅桃井第)에서 서거하였다.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고 있다. 빼어난 문재를 갖추었으나 시절이 허락하지 않으니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강직하여 굽힐 줄 모르니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갈 만큼 유연한 처신을 하지는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그는 중국 위(魏)·진(晉) 왕조 시절 완적(阮籍)과 혜강(嵆康) 등 7인이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린 채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을 주고받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를 표방하여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등 뜻이 통하는 지우 7인과 어울려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을 맺는다”는 의미의 금란(金蘭)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밤이면 시와 술로 즐기며 노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죽림고회(竹林高會)’ 또는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칭하였다. 이인로는 『은대집(銀臺集)』 · 『쌍명재집』 등을 편찬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은대집』에는 공께서 손수 편찬한 부(賦) 5수와 고율시(古律詩) 1,500여수가 실려 있었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문집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재 『동문선(東文選)』, 『대동시선(大東詩選)』,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등에 대략 114수 가량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은 현전하는 우리 민족 최초의 시화집이자 문학비평서다. 『파한집』 3권 1책은 이인로가 69세로 사망하기 직전에 우리나라 명유들의 시 작품들이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한 채 인멸되어 가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집필한 책으로 그의 넷째 아들인 세황(世黃)에 의해 출간되었다. 여기서 그는 “세상의 일 중에서 빈부나 귀천으로 높고 낮음을 가릴 수 없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대개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을 곱게하고, 구름과 연기가 하늘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드러나며 감추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갈포(葛布)를 입은 가난한 선비의 문장에서도 찬란한 빛을 드리우는 무지개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天下之事, 不以貴賤貧富爲之高下者, 唯文章耳. 盖文章之作, 如日月之麗天也, 雲烟聚散於大虛也, 有目者無不得覩, 不可以掩蔽. 是以布葛之士, 有足以垂光虹霓)”라고 문장론을 설파하고 있다. 흔히들 이인로가 중국 고사나 시인들의 명문을 원용해서 쓰는 창작방식인 용사론(用事論)의 대표적인 시인이고, 후학인 이규보가 옛 사람의 표현을 되풀이하기보다 새로운 착상과 표현을 중요시하는 창작방식인 신의론(新意論)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표제의 시는 이인로의 용사적 시작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그러나 이인로가 용사만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작시론(作詩論)은 ‘어의구묘(語意俱妙)’를 강조하고 있다. 어묘(語妙)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즉 도끼로 깎아내린 흔적이 없는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즉 새로운 뜻을 중시하였다. 이런 면에서 이인로를 용사만을 강조한 사대론자이자, 형식주의적 시인으로 폄하(貶下)할 수 없다.


  그는 무엇보다 혼탁한 속세로부터 한발짝 빗겨 서서 세상을 관조하는 은일의 멋을 노래하고 한가함을 추구한 서정시인이었다. 그래서 죽림칠현을 본받아 죽림고회를 결성했고, 최당과 더불어 속세를 떠나기 위해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정서가 잘 드러난 시가 반룡사에 은거할 때 지은 「산거(山居)」라는 시다.     


   春去化猶在 (춘거화유재)

         봄은 갔건만 꽃은 아직 남아 있고

   天晴谷自陰 (천청곡자음)

         하늘은 맑건만 골짜기는 그늘졌네

   杜鵑啼白晝 (두견제백주)

         한낮에 두견새 슬피 우니

   始覺卜居沈 (시각복거침)

         깊은 산골에 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네.      


  초여름 깊은 산속에서 느끼는 시인의 고독한 정서를 시간적, 공간적 대비를 통해 간결하고, 명징하게 묘사하고 있는 절창이다. 끝으로 그가 중국 동정호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염두에 두고 지은 연작시 중 한편인 <漁村落照(어촌낙조)>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잔잔한 수묵화 같은 시경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한시다.

      

    草屋半依垂柳岸 (초옥반의수류안)

         초가집 반쯤 걸친 버들 늘어진 언덕

    板橋橫斷白蘋汀 (판교횡단백빈정)

         외나무 다리 가로 놓인 흰 마름 물가

    日斜悠覺江山勝 (일사유각강산승)

         저무는 햇살에 강산 더욱 아름다워라

    萬頃紅淨數點靑 (만경홍정수점청)

         붉게 물든 만 이랑 물결 속, 몇 점의 푸른 산   

  

  은일을 지향하는 이인로의 의식세계는 표제의 시 속 “求閑得閑識閑味 (한가함 찾아, 한가함 얻어서, 한가함 그 맛을 아시나니)”라는 구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이인로는 칼날이 번득이는 무신정권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한 지식인의 존재론적 고독과 좌절을 시로 승화시키는 한편, 한가한 생활방식을 동경하면서 살다 간 고려의 서정시인이다.


붉게 물든 만 이랑 물결 속, 몇 점의 푸른 산





글씨: 허봉(虛峰) 길재성(吉在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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