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2024년 8월 31일. 천산산맥 협곡에 소음이 가득하다. 온 나라. 그 중에서도 수도 비슈케크, 거기에서도 최중심부인 알라투(Ala-Too) 광장이 그 소란스러움의 진원지다. 소비에트 시절의 ‘카라 키르기스공화국’ 창립 100주년, ‘키르기스공화국’ 독립 33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몇 달 전부터 알라투 광장 주변의 미화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국기봉 건립이다.
2024년 1월 비슈케크에 도착해서 얻은 숙소는 북향 아파트 10층이다. 설산의 연봉을 바라 볼 수 있는 남향집을 찾을 수 없어서 섭섭했지만, 여름 혹서에는 북향집이 더 좋다는 부동산중개인의 권유에 혹하여 현재의 아파트를 계약했다. 그나마 창문 넘어 비슈케크시의 중심인 알라투(Ala-Too) 광장을 굽어보는 조망이 좋아서 나름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건국의 상징인 마나스장군 동상 너머로 하얀 대리석 건물의 역사박물관이 있고, 그 옆에 높게 솟은 국기봉에 걸린 빨간 바탕에 황금빛 햇살의 태양 문양이 그려진 키르기스스탄의 큰 국기가 바람에 차르르르 흔들리는 장면이 단조롭지 않아서 좋았다. 청마 유치환의 시에서 묘사된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같은 느낌을 주던 단아한 깃발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국기봉이 사라졌다. 당초 45m였던 국기봉을 100m 높이로 재건립하겠노라고 거의 1달을 땅을 파고 뭔가 공사를 하더니 드디어 큰 기중기가 동원되어 20여 미터짜리 원통 철근 구조물을 하나씩 수직으로 세워서 조립하기 시작하였다. 원통 하나를 세운 후, 더 높은 기중기를 거의 직각으로 치켜세우면서 상단 원통을 하나씩 끼워 나가더니, 마지막에는 터키에서 온 기술자 4명이 기중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지상 90m 쯤에서 마지막 구조물을 공중에서 끼워 세우는 고난도 작업으로 조립이 마무리되었다. 마치 접이식 지휘봉처럼 위로 갈수록 얇고 뾰쪽해지는 피뢰침 같은 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새로 만든 국기를 게양하였다. 가히 그 크기와 높이가 압도적이다. 지상 100미터 높이에 가로 33미터. 이제 저 멀리서 바람에 물결 흐르듯 팔랑이던 국기가 아니라, 창문 너머 바로 내 눈앞에서 거대한 국기가 펄럭이기 시작한다. 국기공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1인당 소득 2,000불 남짓한 후진국에서 도대체 이런 우스꽝스런 호사가 가당한 일인가? 국민경제와 국가재정의 상당부분을 해외송금과 대외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가난한 나라에서 초등학교 10개를 짓고도 남을 돈을 들여 멀쩡한 국기봉을 부수고 더 높은 국기봉을 새로 세우는 것이 합리적인 자원배분인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그래도 혹시 세계에서 최고 높은 국기봉을 만든 것은 아닐까 싶어 검색해보았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키르기스스탄의 새 국기봉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봉은 2021년말 이집트 카이로 신행정도시에 세워진 국기봉으로, 그 높이가 자그마치 202미터다. 두번째는 2024년 8월에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세워진 191미터의 국기봉이고, 세번째는 2023년 러시아의 쌩 뻬쩨르부르크에 세운 175미터 높이의 국기봉이다. 세계 10등 높이의 국기봉이 130미터고, 20등의 높이가 120미터다. 100미터 높이의 국기봉은 세계 33위 수준이고, 같은 높이의 국기봉만도 무려 15개나 있다. 21세기 들어 더 높이, 더 크게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바벨탑 쌓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2024년 8월말 현재 100미터 이상의 국기봉은 지구상에 46개가 있다. 이 국기봉을 갖고 있는 나라 19개국을 집계해 보면, 멕시코가 14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 아랍 에미레이트 7개, 인도 4개, 터키 3개,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요르단이 각각 2개를 갖고 있었다. 그 외 12개의 나라들(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타지키스탄, 북한,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미국,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핀란드, 브라질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이 1개씩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미국과 핀란드를 제외하고는 비서방권 개발도상국들, 그 중에서도 중미와 중동 그리고 남아시아의 국가들이 높은 국기를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셈이다. 일종의 후진국 콤플렉스다.
한반도도 일찍이 이 유치한 경쟁에 뛰어들었었다. 1980년대 초 북한이 휴전선 인접 마을인 개성특별시 기정동에 80미터 높이의 국기탑을 건립하고 대형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군부정권은 북한의 대형 국기탑에 대항하기 위해 휴전선 남쪽 대성동 마을에 85미터의 국기탑을 건립하였다. 그러자 북한이 더 높은 국기탑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우리 측도 국기탑의 높이를 99.8미터까지 상향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계속 보강하면서 급기야 160미터의 국기탑을 세우고 남북경쟁에서 이겼음믈 자축하였다. 이 국기탑은 철근으로 보강한 구조물이긴 하지만 2010년 아제르바이잔이 수도 바쿠에 162미터짜리 국기봉을 건립할 때까지 28년동안 세계 최고의 국기봉으로 군림했었다.
무릇 인간들은 태고적부터 천상의 세계를 동경해 왔다. 그 동경은 높은 산을 오르고,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세우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칠레의 이스터섬처럼 세계 각지에 산재한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성경에는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쌓으려던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이 파괴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흙벽돌 신전인 지구라트(Ziggurat)가 등장하였고, 약 5,000년 전에 건립된 이집트 쿠프(Khufu)왕의 피라미드는 그 높이가 자그마치 146.6미터로 아직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바다 건너 중미에도 최고 높이 72미터에 이르는 마야왕조의 피라미드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중세에도 하나님을 숭배하고, 하늘나라에 더 가깝게 가기 위한 높이 경쟁은 지속되었다. 서유럽 고딕 양식 성당의 뾰족탑이 그 예다. 1311년 영국 링컨성당의 첨탑이 160미터에 이르면서 3,800년동안 누려온 쿠푸왕 피라미드의 기록을 능가하였다. 이 후 지진으로 링컨성당의 첨탑이 붕괴된 후에는 1439년 완공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 성당이 1874년까지 세계 최고 건축물의 타이틀을 자랑하였다.
영국 링컨성당 전경
그러나 20세기 들어 철근을 넣은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높이 경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였다. 오늘날의 건축물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다. 20세기 내내 고층건물의 대명사는 미국이었다. 그러나, 1998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406미터 높이의 페트로나스 타워가 들어선 이래 21세기에는 중국, 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중동 국가들이 세계 최고층 빌딩 기록을 연이어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현 세계 최고의 건물은 2010년 완공된 두바이의 부즈 칼리파(Burj Khalifa) 빌딩으로 높이 828미터에 이른다. 게다가 사우디 아리비아에서 높이 1km의 건물을 신축중이라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세상이 이런 판국이니 후진국들이 초고층건물 대신 돈 적게 드는 국기봉 건립에 집착하는 심리를 이해할만하다. 명품은 사고 싶으나 돈이 없으니 짝퉁으로라도 과시하고 싶은 가난한 집안 따님의 소박한 소비심리랄까? 독립한 지 불과 33년의 신생국.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도 없이 중앙아시아 산골짜기에 박혀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약소국 키르기스스탄이지만 우리도 당당한 독립국가라는 자부심을 만방에 선포하고픈 마음이 왜 없으랴. 그래서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 창립 100주년, 독립국가 창립 33주년에 맞춰 높이 100미터의 국기봉에 33미터 폭의 국기를 내걸었구나... 그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알라투 광장에서 펄럭이는 약소국 키르기스스탄의 붉은 국기가 새삼 애처러워 보인다. 그래 우리나라도 1960년대 세계 최빈국 시절에는 뭔가 꼬부라진 것 하나라도 발견하면 “세계 최초”니, “동양 최대”니 하는 유치한 타이틀을 갖다 붙이기 일쑤였다오. 그대들은 고기는 싫컷 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고기 사먹을 돈이 없어서 중국집 짜장면 곱빼기로 생일잔치하고, 졸업축하하던 시절이 있었다오. 부끄러워마오, 키르기스인들이여. 그 대신 휘날리는 국기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자랑스런 내 나라 키르기스스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추신>
두어달 전, 서울시장이 뜬금없이 세종로에 100미터 높이의 국기봉을 건립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적이 있다. 알라투 광장의 국기봉을 보며 한마디 던집니다. 100미터 높이의 국기봉은 가까이에서 보면 ‘국기봉’이 아니고 차라리 ‘국기굴뚝’이라오. 그리고 이걸 개활지도 아니고 좁다란 광화문 사거리에 세운다고요? 세종대로 한 복판에 생뚱맞게 높은 굴뚝을 세워 도시균형을 깨뜨리는 문제는 우짜고, 국기 펄럭이는 소음공해는 어찌 감당하며, 서울의 자랑인 북한산 준봉을 가리는 조망권 훼손은 우야실랍니까? 게다가 민족의 사표인 이순신, 세종대왕의 동상과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궁 위로 커다란 깃발이 제멋대로 펄럭이는 천박함은 어이하시렵니까? 세계 다섯 번째, 555미터 높이의 롯데타워를 품은 도시 중심에 겨우 100미터의 국기봉을 세워 새삼 국위를 선양하겠다고요? 어림없는 얘기죠. 세계 어느 선진국 도시가 좌우로 차량들이 쌩쌩 달리는 중앙대로 한복판에 거대한 국기봉을 건립했던가요? 이것이야말로 공산주의식 프로파간다(propaganda)고, 아직도 후진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 발상인 것 같소이다. 주위에 즐비한 아첨꾼들, 업자들 얘기만 듣지 말고, 후진국이라고 비웃지 말고, 가장 최근에 건립된 국기봉을 시찰하러 겸손한 마음으로 비슈케크시를 다녀가시라고 권하고 싶소이다.